항목 ID | GC022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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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彦撝 |
영어음역 | Choe Eonwi |
이칭/별칭 | 최신지,최인연,최인곤,문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봉림사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비문을 쓴 신라말 고려초 문신.
[개설]
최언위는 통일신라 말 도당 유학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최치원(崔致遠)[857~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삼최(三崔)’로 불리는 문신이다. 도당 유학 후 신라로 귀국하면서는 최인연(崔仁渷)으로 불렸으나, 경순왕을 따라 고려로 귀부한 이후에는 최언위(崔彦撝)로 개명하였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는 본디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신지(愼之)·인연(仁渷). 최언위의 집안은 경주최씨 육두품 출신 집안으로 최승로(崔承老)[927~989] 가문과 같이 고려 전기의 대표적 ‘업문적(業文的)’ 가문으로 꼽힌다. 최언위는 최광윤(崔光胤), 최행귀(崔行歸), 최광원(崔光遠), 최행종(崔行宗)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최광윤은 빈공진사로 후진(後晉)에 유학하였고, 최행귀는 오월(吳越)에 유학하고 돌아와 광종을 보필하였다. 최광원은 광종 대에 비서소감(秘書少監)을 지냈고, 최광원 아들 최항(崔沆)은 성종 대에 급제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최언위는 897년(효공왕 1) 30세의 나이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에 유학하여 39세 때인 906년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당이 멸망하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였으며, 42세가 되던 909년(효공왕 13) 신라로 귀국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과 집사시랑(執事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경명왕과 경애왕 대에 후량(後梁) 등 외국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 후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부하여 태자의 사부(師傅)와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았다. 943년(고려 혜종 1) 사망할 무렵 최언위의 최종 직함은 대상 원봉대학사(大相元鳳大學士) 한림원령 평장사였다.
[학문과 사상]
최언위는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불교와 조화 내지는 절충을 꾀하려 하였다. 고려 귀부 후 반신라(反新羅)로 돌아섰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태조를 성군(聖君)으로 극찬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덕망보다는 책략에 뛰어난 인물임을 부각하여 신라인의 의식을 끝까지 견지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시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최언위가 찬한 글로 선사(禪師)들의 부도탑비명(浮屠塔碑銘) 10여 점이 전한다. 봉림사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외에 흥령사의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탑비(寶印塔碑), 태자사(太子寺)의 낭공대사(朗空大師) 백월서운탑비(白月棲雲塔碑), 서운사(瑞雲寺)의 료오화상(了悟和尙) 진원탑비(眞原塔碑), 광조사(廣照寺)의 진철대사(眞澈大師) 보월승공탑비(寶月乘空塔碑), 보리사(菩提寺)의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탑비(玄機塔碑), 비로암(毘盧庵)의 진공대사(眞空大師) 보법탑비(普法塔碑) 등을 직접 찬술하거나 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영이며, 정광(正匡)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