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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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掛書事件 |
영어의미역 | Changwon Appeal Event |
이칭/별칭 | 영남괘서사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적은 글을 괘서한 사건.
[개설]
괘서(掛書)란 벽서라고도 하며,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이다. 대부분 발표자의 이름을 숨겼으므로 이를 익명서로 간주하였으며, 괘서사건은 역대 왕조를 통하여 엄격한 규제를 단행하였으나 빈번하게 일어났다.
괘서는 조정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을 가진 백성들에 의해서 민심의 선동매체로서 꾸준히 이용되어 왔으며 소극적이지만 농민항쟁의 한 양상이었다. 또한 괘서는 대중매체가 없었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현실을 널리 알리는 정보 제공의 구실을 하였다.
[목적]
창원괘서사건은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세도정치에 따른 사회적 폐단이 심해지자 이에 시달린 백성들이 괘서를 이용하여 나라를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지방관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발단]
지방관에 대한 불신과 사회에 대한 불만 누적이 원인이 되어 1801년(순조 1) 의령에 사는 전지효(田志孝)가 그의 매형을 시켜서 창원에 괘서하게 하여 민심을 선동하면서 전개되었다.
[경과]
창원괘서사건은 “문무(文武)에 재주가 있으나 권세가 없어 출세하지 못하는 자들은 따르라”는 내용의 글을 흰 명주에 써서 경상도 하동 두치장(斗峙場)에 내건 하동괘서사건(河東掛書事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동의 괘서 사건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평소에 요언(妖言)을 퍼뜨리던 이호춘(李好春)이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방실(李邦實)이 지방민의 차별에 불만을 지닌 부유한 진사 정양선(鄭陽善)에게 부연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그 지방에 크게 전파되면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의령에 살고 있던 소작농민 전지효는 하동괘서의 내용을 부연해 글을 써서 진주에 사는 매형 이진화(李震化)를 시켜 창원에 내걸었다가 떼어오게 하고는 이임(里任)을 통해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매형 배진경(裵縉慶)에게도 글을 써서 걸게 하였다. 또한 배진경의 아우 배윤경(裵綸慶)에게도 글을 써서 걸게 하는 등 전지효가 주도해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괘서하였다. 이 괘서의 내용은 대개 ‘천하의 지모와 힘이 있는 자는 모두 북소리에 맞추어 뒤를 따르라.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겠다. 수령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결과]
창원괘서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정부에서는 안핵사 한용탁(韓用鐸)을 파견해 관찰사 김이영(金履永)과 함께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전지효는 이 괘서를 정양선의 소행으로 조작하였으나 사실이 밝혀져, 이진화·배윤경 등과 함께 범상부도죄(犯上不道罪)로 처형되었다. 또한 정광선(鄭光善)·최광한(崔光漢)·이방실(李邦實)·정철손(鄭哲孫)·김맹용(金孟用)·정양선(鄭陽善) 등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벌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괘서사건은 하동괘서사건과 더불어 영남괘서사건으로 통칭되었다. 전지효의 의도는 괘서를 신고함으로써 상을 받으려 하였다지만, 여러 면에서 19세기 초반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사건이다. 특히, 긴밀한 관계가 아닌 인물들 사이에서 평소의 선동, 괘서 내용의 교묘한 해석, 그 내용의 전파와 선동, 괘서부착의 사주와 실행, 범인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것, 괘서로 인한 피난 등의 행위가 비교적 조직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괘서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