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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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大路鬪爭 |
영어의미역 | Changwon Main Street Conflict in 1989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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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9년 |
종결연도/일시 | 1989년 - 창원 대로 투쟁 종결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창원시 |
관련인물/단체 |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
[정의]
1989년 경상남도 마산·창원 지역에서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가두 투쟁.
[개설]
1989년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이 일으킨 투쟁으로 일주일 정도 창원대로와 창원공업단지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 투쟁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진은 1988년까지 계속되어 노동조합 결성 투쟁과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그리고 임금인상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1988년 말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 탄압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중심지로 전국 최초의 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결성하여 활발한 연대투쟁을 펼쳤던 마산·창원 지역은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발단]
1989년 4월 24일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에서 ‘마산·창원 투본 쟁의 결의 및 방산특위 발대식’이 열렸다. 마산에 있는 사업장과 인근의 한국중공업·세신실업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오전 근무를 한 후 집단 조퇴를 하고 집회에 참가했으나 창원공업단지에 있는 (주)통일, 현대정공, 기아기공, 대림자동차, 금성사 등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경찰이 마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가두행진을 원천봉쇄했다.
[경과]
경찰의 원천봉쇄에 분개한 노동자들은 화염병과 돌 심지어 길가에 있던 포장용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리며 격렬히 저항했다. 창원대로를 가운데 두고 공단 쪽에는 노동자 대오가, 주거 지역 쪽에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 대오가 맞서는 형국이었다. 최루탄 연기와 화염병, 짱돌, 콜타르 연기가 난무한 가운데 창원대로 10차선은 차량통행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들은 창원경찰서 지하실에 끌려가 폭행을 당했으나 경찰은 이를 부인하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민주당의 진상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4월 26일 오후부터 다시 가두투쟁을 전개했고, 이튿날 이흥석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의장이 재차 진상조사를 하러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구속되면서 투쟁은 더욱 확산되었다.
4월 27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40여 개 노조는 오후에 집단 조퇴, 임시총회 등의 형태로 전원 가두로 진출하여 ‘살인정권 타도’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4월 28일~29일 이틀 동안 마산창원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 총파업 투쟁으로 확산되었으며 5월 초까지 이어졌다. 이 후 5·3 동의대 사태가 발생하고 5월 4일 경남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국노동자결의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면서 수그러들었다.
[결과]
창원대로투쟁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지도부와 산하 노동조합에 대한 집중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1989년 상반기에 구속·수배된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의 수는 60여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