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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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宗鎬 |
영어음역 | Im Jongho |
이칭/별칭 | 임종호 열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철 |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했던 노동운동가.
[개설]
임종호는 1964년 12월 14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1983년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전인 1982년 10월 동양기계[현 세일중공업]에 입사하였다.
[활동사항]
임종호는 입사 후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정당방위대에서 활동하였다. 1989년 5월 창원대로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수배,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소 후, 1991년 굴뚝농성투쟁에 가담하여 「쟁의조정법」과 업무방해죄로 2차 구속되어 실형 10월이 선고되었다가 재판 과정에서 법정모독죄 추가로 실형 3년이 선고되었다.
재판을 받던 도중 수갑을 풀어 주지 않는 데 대해 항의하였으나 재판부가 잠깐이면 된다면서 그대로 재판을 진행하자, 마침 손에서 저절로 빠져 나온 수갑을 그대로 재판장에 던짐으로써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진주교도소 3.54㎡의 독방에 수감 중이던 임종호는 1994년 9월 18일 새벽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교도소 측은 자살이라고 발표하였지만 여러 정황을 살펴보건대 임종호의 자살에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너무 많았고, 이에 노동조합 측과 가족들은 여러 차례 의혹을 제기하였다.
마창노련 및 통일중공업[현 세일중공업] 노동조합에서는 의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을 준비하는 한편, 장례식을 노동조합장으로 치르고 양산 솔밭산 박창수 역사 묘역에 안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을 받아 1994년 9월 23일 노동조합장을 번복함에 따라 장례는 9월 25일 가족장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임종호의 유골은 동지들의 오열과 통곡 속에서 아버지의 손에 의해 고향집 내천에 뿌려졌다.
[상훈과 추모]
장례식 다음 날인 9월 26일 통일중공업 앞마당에서는 조합원과 지역 노동자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 집회가 열렸다. 임종호는 평소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노동자적 비타협적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임종호는 법을 지켜야 할 재판부가 스스로 불법과 편법을 노동자에게 강요함으로써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노예로 길들이려는 데 항의하면서 노동자의 자존심과 주체성으로 당당하게 맞섰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