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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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達鎭 |
영어음역 | Gim Daijin |
이칭/별칭 | 월하(月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혜미 |
성격 | 시인|한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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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진해시 소사동 |
성별 | 남 |
생년 | 1907년 |
몰년 | 1989년 |
본관 | 김해 |
대표경력 | 남면중학교 교장|동양불교문화연구원장 |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한학자.
[개설]
김달진은 1907년 2월 4일 경상남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진해시 소사동은 당시 창원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김달진은 젊은 시절 불교의 세계를 접하고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불교에 대한 김달진의 열정은 작고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김달진은 1989년 6월 7일 오전 11시 10분 82세의 나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643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활동사항]
김달진은 1920년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신병으로 중단하였다. 1923년 다시 서울에 있는 경신중학을 다녔으나 4학년 때 일본인 영어 교사 추방 운동에 앞장서다 퇴학당하였다.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였다. 1936년에 유점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중앙불교전문대학(혜화전문학교의 전신, 현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졸업하였다.
김달진은 1929년 『문예공론』에 「잡영수곡」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 후 생명파 시인인 서정주·김동리·오장환 등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쳐 나갔다.
김달진의 삶은 불교를 접하며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되었다. 김달진은 1934년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 김운악(金雲岳)을 선생으로 모시며 불교의 세계에 다가갔다. 불교의 세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김달진은 활발하게 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김달진은 은사 백용성(白龍城)을 쫒아 함양 백운산 화과원(華果院)에서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수도 생활을 하였다.
김달진은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 유점사를 떠나 북간도로 갔다가 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곧 짧은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1946년 교직에 몸담아 경북여자중학교, 진해중학교를 거쳐 경상남도 창원군 남면중학교[현 창원남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60년 창원군 남면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1962년 동양불교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 이운허(李耘虛)를 법사(法師)로 모시고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 심사위원으로서 고려대장경 역경 사업을 펼쳤다.
[저술 및 작품]
김달진은 불교 관련 문학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 서사 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와 서산대사의 시선집 및 한국의 선시(禪詩)를 소개하는 저서들을 출간하였다. 시집으로 『청시』(1940)·『올빼미의 노래』(1983)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장자』·『법구경』·『손오병서』(1954)·『한국의 사상 대전집』(1972)·『한국선시』(1985)·『금강삼매경론』(1986)·『당시전서』(1987)·『보조국사전서』(1988)·『산거일기』(1990) 등이 있다. 김달진 전집은 총 19종 22권에 달한다.
[상훈과 추모]
1991년 10월 20일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1995년 4월 김달진의 제자인 경남대학교 교수 신상철이 중심이 되어 김달진 시비를 건립하였다. 1996년부터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를 주축으로 김달진문학제전위원회를 결성하여 해마다 가을에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김달진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 김달진의 문학과 불교에 대한 열정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시에 김달진 문학관을 개관하여 김달진의 문학적 혼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