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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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疏通-昌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대외 교역과 문화 교류.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마산시·진해시가 2010년 7월 1일부터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어 창원시가 되었다. 행정 구역 변천에 따라 통합과 분리 과정을 거듭해 왔지만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역사 발전 과정으로 볼 때 창원 지역은 바다와 강을 통한 교역과 문화 교류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고대의 창원 지역에는 골포국·주조마국·탁순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 그리고 가야의 여러 나라들과 남해안·낙동강을 통하여 교류했다. 고려 시대에는 마산만이 가진 항구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과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이 때문에 군사 도시로 발전했으며, 석두창이라는 조창이 설치되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생산물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진해의 제포는 일본과의 공식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도예 기술 등의 조선의 선진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한말 자본주의 열강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창원 지역은 근대 도시로 발전했다. 마산은 1899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되어 다양한 근대 시설이 들어섰다. 진해는 1904년 러일 전쟁 이후로 일본의 관심이 높았던 지역으로 1910년에 군항 설치 공사가 시작되는 등 일본에 의해 근대적인 계획도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진해 우체국 등 근대 시설과 일본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많은 물질적 자료들이 남아 있다.
해방 이후에도 창원 지역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한일 합섬, 자유수출 지역, 진해 화학, 창원 기계 공업 단지 등의 많은 산업 시설이 건설되어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고대의 해상 왕국 골포국과 탁순국]
1. 골포국
골포국은 삼한 시기 마산만에 자리 잡은 해상 국가였다. 골포국을 비롯한 경남 지역에 자리잡은 정치 집단들은 낙랑이나 왜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골포국 또한 자연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교역을 통하여 성장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漢)·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라는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의 기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골포국으로 추정되는 창원 지역에도 중국·일본과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다. 창원 성산 패총[현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성산패총로 137]에서는 중국 한나라에서 주조하기 시작한 오수전과 일본계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에서는 일본 계통의 철로 된 창, 창원시 의창구 삼동동에서도 왜계의 청동 화살촉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골포국은 남해안과 같은 교통로를 따라 중국의 군현이나 일본과 교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입품은 주로 의책, 거울, 칠기, 유리제 장신구 등과 같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고, 수출품은 철·포(布) 등이었을 것이다. 성산 패총에서 철 생산과 관련된 야철지가 조사됨으로써 철이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원 지역의 정치 집단인 골포국은 철을 한군현이나 왜 그리고 인근 지역으로 수출하였던 것이다.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에도 선진적인 정치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나 중국제 청동 거울은 당시 북쪽에 존재했던 낙랑군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량의 철기 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호리 지역이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변진 주조마국(走漕馬國)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다호리 1호분은 수준 높은 정치 집단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며, 길이 240㎝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고, 다양한 부장품이 나왔다. 세형 동검·철검·철제 고리자루 손칼[鐵製環頭刀子]·청동 투겁창·쇠 투겁창·판상철부·쇠 따비·성운문경(星雲文鏡)·청동 띠고리[靑銅帶鉤]·오수전(五銖錢)·청동 종방울[銅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 곽을 비롯하여 검집·원형두(圓形豆)·방형두(方形豆)·원통형 칠기·각형(角形) 칠기·붓·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 토기와 와질 토기 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경, 오수전,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 곽 등의 중국 한식(漢式)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의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 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 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 낙동강 변의 창원시 의창구 동읍 지역에 선진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2. 탁순국
탁순국은 가야에 속했던 고대 국가로서 창원 지역에 위치했다.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그 때문에 백제와 왜의 교류를 주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탁순국 말금한기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 사신에게 자문해 주고 왜국 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 사람 과고를 보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즉 탁순은 왜와 통할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였던 것이다.
또한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탁순을 통하여 왜와 교역하고자 했다. 백제가 탁순의 인도에 의해서 백제에 도착한 왜의 사신에게 오색 채견(綵絹)[두껍고 무늬가 없는 여러 가지 고운 빛깔의 비단] 각 한 필과 철정(鐵鋌)[쇳덩이] 등을 하사하고 있고, 왜의 사신에게 “우리나라에는 진보(珍寶)가 많이 있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왜와 우호적인 관계 내지 왜와의 교역을 주도하려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탁순은 왜와 교류하고 있었고, 백제는 탁순을 통하여 왜와 교류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탁순이 백제와 왜의 교류를 중재하였던 것이다.
탁순이 현재 창원 지역에 해당하므로 지금의 마산만이 왜와 백제와의 중요한 교통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큰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라는 표현으로 보아서도 해상로, 즉 남해안을 따라서 백제가 탁순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탁순이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인근 정치 집단들과 다양한 문화적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으로 아라가야[함안], 동쪽으로 가락국[김해]이 자리잡고 있었다. 함안 지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것은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 토광묘 2호에서 화염문 투창 고배가 3점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토기 양식은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의 함안 지역의 독자적 형식의 토기이다. 일본의 긴끼[近畿] 지방에도 출토되고 있는데, 탁순과 왜와의 관계가 활발했으므로 탁순을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는 도계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5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는 하지키[土師器] 계통의 적갈색 토기의 출현이다. 이로 보아 창원 지역은 중요한 교역로로서 인근의 가야 제국 및 왜와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여몽 연합군의 전진 기지 창원]
고려에 대한 원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된 이후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시작되었다. 조그마한 항구였던 합포가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합포가 지닌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연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과의 직선거리가 짧아 발진 기지로 활용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이라는 조창이 있어 인근 지역의 조세가 이곳으로 수납되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에도 유리하였다.
물론 합포 지역은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정벌 기간 동안 합포는 군사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함 건조 등과 관련된 군수 산업이 발전했을 것이며, 군사 시설도 들어섰을 것이다. 게다가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의 활성화도 가져왔을 것이다. 더욱이 정벌 독려를 위하여 충렬왕이 합포에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마치 임시 수도와 같은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합포의 모습은 고대로부터 바다를 통해 소통했던 창원 지역의 정체성이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최초 개항지, 진해 제포]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선의 태조와 태종은 교린 정책으로 이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 왜인들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밀려들자 조선 정부에서는 왜인의 출입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1407년(태종 7)에 왜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군사적 통제가 가능한 곳으로 한정하였다. 부산포와 지금의 진해 지역에 위치한 제포도 그중의 하나였다. 제포는 본래 내이포였다. 제포에는 해상 방어를 위한 경상우도의 도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진해 지역의 제포는 조선 최초의 개항지로서 2013년 현재 개항 606주년이 된다. 제포와 부산포의 개항 이후 왜인들은 개항장을 추가 요구하였고, 이에 1418년(태종 18)에 울산의 염포와 고성군의 가배량을 개항하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의 교린 정책은 순탄하지 않았다. 1418년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조선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종무와 최윤덕, 병사 1만 7000명으로 하여금 6월 13일[음력] 합포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제포를 비롯한 4개의 개항장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대마도 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제포와 부산포, 1426년 염포에 왜인의 왕래를 허가하여 이른바 삼포가 개항되었다. 삼포 개항 이후 10년간 왜인의 수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1435년(세종 17) 경상 감사는 제포에서의 왜인 증가에 대해 ‘방 안에 뱀을 기르는 것’과 같이 위험하다고 우려하면서 대마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제포에 거주하는 왜인을 30호로 한정하였다. 이로써 제포가 개항장을 넘어서 왜인의 법적 거주지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개항지에서의 왜인 증가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들 만들기 시작했다. 왜와의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지에 왜관을 설치하고 토성을 쌓는 등 왜인 거주지를 정비하였으며, 웅천현성을 건설하여 왜인에 대한 행정 통치를 강화하고, 제포진성의 구축으로 군사 시설을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삼포 개항 10년 후인 1436년 내이포 만호를 경상우도의 도만호로 승격하고, 이듬해 합포에 있는 해군 기지를 제포로 옮기고, 1486년 제포진성을 완공하는 것까지 50년간 계속되었다. 행정적인 개편도 뒤따랐다. 1452년 제포 지역을 김해 도호부로부터 독립시켰다. 즉 웅신·완포·천읍의 3현을 통합하여 웅천현으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제포에 거주하는 왜인이 급증하여 1494년(성종 25)에는 2,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왜인들은 제한 구역을 넘어 경작도 하며 점차 거주 범위를 넓혀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1510년(중종 5)에 삼포 왜란이 일어났다. 대마도의 병력들이 제포의 왜인들과 합세하여 웅천성을 함락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 군대가 반격을 하여 진압함으로써 왜관은 폐쇄되었고, 통교 또한 단절되었다. 그리고 웅천현을 웅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통교 단절로 곤궁해진 대마도 도주는 통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는 왜란을 일으킨 수괴의 처형 등을 요구하였고, 쓰시마 도주가 순응하였으므로 제포만 개항하였다. 하지만 제포는 앞바다에 크고 작은 섬이 있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하여 가덕도에 성을 쌓고 1544년(중종 39) 왜관을 부산포로 옮기고 제포항은 폐쇄되었다.
[임진왜란과 진해]
1. 진해 지역의 왜성
진해 지역은 임진왜란 초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위세에 눌려 일본군이 쉽게 항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요새를 정비하고 웅천과 안골포 일대를 군사 기지로 설정한 이후에는 조선군이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다. 이 당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대표적 방어 시설이 왜성(倭城)이었다. 왜성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이 조선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남해안의 주요 지역에 축조한 성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왜군은 조선 수군에게 좋은 항구를 내주지 않을 심산으로 항구를 감시할 수 있는 산의 정상부에 주성곽을 설치하고 그 외곽에 성벽을 설치하였다. 일본군은 본토에서 보낸 물자를 조선의 육로로 안전하게 보급하기 위한 항만이 필요하였고, 또 이순신 함대가 정박할 수 있는 좋은 항구를 내주지 않기 위하여 항[포]구를 감시할 수 있는 산 정상부에 성곽을 설치하였다. 왜성은 ‘수군 원호’와 ‘보급기지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울산~거제로 연결되는 해안 지대 18곳에 성을 쌓았다. 왜성에서는 조선군이 항만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고지대에 화포를 설치하여 조선 전함을 협공하였다. 그리고 조선군도 효율적인 해상 작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육지와 연결되는 항구에 정박할 필요가 있었으나, 왜성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우려하여 작전을 마친 뒤에는 본래의 기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처럼 왜성은 일본군의 안전을 보호하는 방어 시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성곽을 쌓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해상에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경남 연안에 왜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3년 사이이다. 즉 1592년 5월 이후 부산포 서쪽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참패하면서부터였다. 진해에 남아 있는 왜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웅천 왜성과 안골 왜성, 명동 왜성이다.
웅천 왜성은 제포와 안골만 사이에 반도처럼 돌출한 남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웅포만을 포용하고 있어 육로는 물론 해로로 안골포·마산·가덕도·거제도와 연락이 쉽고 일본과도 가까운 요지였다.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593년 4월 18일 서울에서 퇴각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웅천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축성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에 고니시가 웅천 왜성에 장기간 주둔한 것은 사실이며, 그의 사위이며 쓰시마 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인근에 위치한 명동 왜성에 주둔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정유재란 당시 이 웅천 왜성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철수할 때 성을 불 질러 내부 건물은 없으나, 성벽은 지금까지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중 웅천 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이에 강화 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웅천 왜성은 일본군이 쌓은 왜성 중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현재까지 성벽과 축조 방식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천주교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1551~1611]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조선인에게도 선교 활동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안골 왜성은 남해안에 쌓은 18개 왜성 중 하나이다. 1593년경에 일본 장수 구키 요시타카[鬼嘉隆],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등이 축성하였다. 이후 세 장수가 1년씩 번갈아 수비한 왜수군의 본거지였다. 정유재란 시기에도 왜수군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으며, 명량 해전 이후 왜 수군이 주둔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명동 왜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축조되었다. 본성은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30 일원에 위치해 있으며, 외성은 창원시 진해구 명동 354-1에 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주둔해 있던 성이다.
2. 도예(陶藝) 기술의 일본 전파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8년, 왜장 마쓰우라는 퇴각하면서 진해 지역 주민 125명과 웅천 자기소의 도공 거관(巨關) 등을 끌고 갔다. 그는 거관을 큐슈의 나가사키에 정착시킨 뒤 도자기를 굽게 하고, 신분과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거관의 집안은 대대로 도공의 지위를 이어나가면서 고급 자기를 제조하였다. 한편 이 무렵 웅천에서 끌려간 젊은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도예 기술이 뛰어나 최고급 고려찻잔과 말차(抹茶) 찻잔을 만들고, 독특한 회색 유약을 개발하는 한편, 조선 백자의 정수를 잇는 흰색 자기를 생산하여 황실과 각 영주에게 공급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개항과 창원]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0년대에 들어와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등과 잇달아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문호의 개방은 동래의 부산포[1876년], 덕원의 원산포[1880년], 인천의 제물포[1883년] 등 개항과 더불어 무역의 확대, 외국 문물의 도입을 가져와 조선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마산포에서 이루어지던 조운의 방식도 변화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3년 전운국(轉運局)을 설치하여 지방에서의 세곡 운송을 외국의 기선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가 1886년에는 전운국이 직접 기선을 도입하여 세곡 운송을 전담하였다. 이 무렵 마산포의 세곡 운송을 위해 고용된 외국 기선은 붕기복호(朋其福號)[1889년; 노르웨이 상선], 우전천환(偶田川丸)[1890년; 일본 상선], 현익호(顯益號)[1892년; 독일 상선] 등이었다. 1893년에는 관영 기업으로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하고 창룡호(蒼龍號)·현익호(顯益號)·이운호(利運號) 등의 기선을 구입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기선은 주로 마산포에서 인천으로 세곡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의 실시로 각종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게 됨에 따라 조운이 폐지되었고 마산포의 조운 기능도 상실되었다. 조운의 폐지는 세곡 운송을 기반으로 주요 포구로 성장하고 있었던 마산포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 마산포의 개항
창원 지역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마산포의 개항이었다. 1899년 마산포의 개항 이후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마산이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창원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행정 구역이 되었고, 근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근대 시기 창원의 역사는 마산포의 개항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반도 내 열강의 세력 균형을 위해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려는 조선 정부와 무역 확대에 따른 이익을 노린 외국의 요청이 거듭되면서 1897년에 증남포와 목포가 추가로 개항되었다. 이어서 1898년에는 마산포 등의 개항이 추진되었다. 1898년 5월 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은 각국 공사에게 마산포·군산·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마산포에 창원 감리서가 설치되고, 창원부윤 안길수(安吉壽)로 하여금 감리 서리를 겸무하면서 개항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창원 감리는 마산포로부터 약 2㎞에 있는 창원부 외서면의 신월동과 월영동 일대 42만 9000여㎡을 구획하여 각국 공동 조계지로 설정하였다. 이를 1899년 5월 1일[이 때문에 통합 전 마산 시민의 날은 5월 1일이 되었다] 각국 대표자인 부산 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에게 인도함으로써 마산포의 개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2일에는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 공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포 각국 공동 조계 장정이 조인되었다.
2. 창원의 근대 시설
마산포의 개항에 따라 근대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개항장 사무를 담당하는 감리서뿐만 아니라 세관, 우체사, 전보사, 재판소, 각국 영사관 등이 그것이다. 정부는 1899년 5월 22일 칙령 제21호로 창원항 재판소를 설치하여 개항장인 마산포와 창원 지역의 재판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같은 날 칙령 제24호, 제25호로 창원 전보사[1등사]와 창원 우체사[1등사]를 설치하여 전보와 우편 업무를 맡게 하였다. 개항과 동시에 부산세관 마산 출장소도 설치되어 부산 세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과 일본인이 각각 주임과 보조로 임명되었다.
외국의 영사관도 들어섰다. 일본은 마산포 개항 직후인 1899년 5월에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 마산 분관을 설치하고 대리 영사를 두었다가, 1900년 4월 마산 영사관으로 승격시켜 영사로 하여금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러시아도 1900년 3월 소코프(S. Sokoff)를 마산포 부영사로 임명하여 창원 개항장에서의 영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3. 근대 무역항, 마산포
1894년 조운의 폐지로 타격을 입었던 마산포는 개항 이후 외국 무역 확대와 더불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개항 초기에는 수출액이 8,000엔, 수입액은 2만 엔 정도였지만, 점점 증가하여 1905년에는 수출 14만 엔, 수입 44만 엔으로 급증하였다. 당시 마산포의 수출품은 거의 대부분 곡물이었다. 1908년에는 쌀·보리·콩 등 곡물의 수출이 전체의 74%를 차지하였으며, 1909년 역시 80%에 달했다. 수입품은 대부분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에서 들어왔는데 면포나 면사 등 면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설탕·석유·성냥·무쇠 등 생활용품과 일부 사치품도 있었다.
1905년 이후 마산항의 무역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삼랑진~마산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 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4. 러일 전쟁과 창원
일본이 창원 지역을 독점하기 시작한 것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가 계기였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을 통보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군대를 한반도에 진주시켜 주요 지역을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뤼순[旅順]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때 군사적 요충지였던 창원 일대는 일본군의 일차적 점거 대상이 되어, 2월 6일 불법적으로 마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전보사와 우체사를 장악하였다.
2월 23일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을 일본의 동맹국과 같은 지위로 만드는 한편 군사 작전에 필요한 곳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쟁 시작과 함께 일본군이 한국의 여러 지역을 강제로 점령하는 것을 추인해주는 한편,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많은 땅을 점거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3월에 칠원군 영도[현재의 진해구 잠도로 추정]와 심리 일대[현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를 점거하여 포대를 쌓고 대포를 설치하였다. 5월에는 한산도에 들어가 포대를 구축하였고, 해군 방비대 기지를 만들기 위해 거제도 송진포의 많은 땅을 수용하기도 했다. 1905년 1월에는 가덕도 일부를 수용하는 등 창원 주변의 많은 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창원 주변 지역 여러 곳에 군사 기지를 구축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해서 철도를 부설하여 당시 완공 단계에 있던 경부 철도와 연결하려고 하였다. 1904년 9월 한국 정부의 사전 승인이나 양해도 없이 일본 육군 철도 건설 대원과 철도 건설 자재, 측량기 등을 실은 수송선을 마산포에 입항시키고, 마산포와 삼랑진 사이의 군용 철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지반 공사를 마치고 선로 부설 공사에 이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560m의 교량 공사를 마무리하여 1905년 5월부터는 마산포와 삼랑진을 연결하는 군용 열차를 개통했다. 일본은 이러한 철도 부설 과정에서 정거장 부지 등으로 철도 용지를 지나치게 넓게 확보하여 헐값에 수용함으로써 많은 한국인들의 재산을 빼앗아갔다.
[근대 계획 도시 진해와 군항 건설]
근대의 진해는 제국주의 열강 간 패권 다툼의 과정에서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신설된 도시였다. 제국주의 시대 세계열강의 세력 구도는 남쪽으로 팽창을 추진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미국 등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력 구도가 한반도에서는 영국의 후원을 받는 일본과 러시아 간 대결로 표출되었다.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의 지배층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친밀하게 지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의 친러 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당시 정책을 주도하였던 명성 황후를 살해하는 야만적 사건[을미사변; 1895년]을 자행하였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아관파천[1896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대립과 협상을 계속해 나갔는데, 특히 조선이 새로 개항하는 지역에 대한 조계지(租界地)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1898년 마산항이 개항되자 러시아는 그 주변에 자신들의 동양 함대를 위한 해군 근거지 설치를 시도하였지만, 일본의 교묘한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1900년 2월 거제도와 진해만 부근에 군함을 보내 이 지역의 해안과 토지에 대한 측량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다시 좌절되었다.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하 정책은 급기야 영국과 일본 간의 영일 동맹[1902년]을 야기하였고, 러시아와 일본 간 대립은 1905년 러일 전쟁으로 폭발하였다. 1905년 5월 27~28일 가덕도 앞바다의 대한 해협에서 벌어진 러시아 발틱 함대와 일본 해군의 대결은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종료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행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뒤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진해 군항 건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진해만 내에 군항을 건설하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12월 선박 두 척을 보내 지금의 진해 도만동 해안에 상륙시켜 측량을 실시하였고, 1906년 7월에는 조선 정부에 입력을 넣어 지금의 진해 지역을 군항으로 선정 발표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진해 지역 토지를 헐값에 반강제적으로 수용하였다.
마침내 1910년 4월부터 현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군항 시설 공사가 진행되었다. 속천만 일대는 일본인 상공업자를 위한 시설로 정해졌고, 진해에 거주할 일본인의 주택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시가지를 구획하고, 그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현재의 경화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시가지 규모는 본래 인구 5만 명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3월 진해 군항 설치 공사가 완료되자, 다음 해 4월 1일 진해 군항을 ‘진해 요항(鎭海要港)’으로 고쳤다. 1936년에는 현재의 해군 사관 학교 자리에 일본 해군 항공대를 설치하였고,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인 1941년에는 풍호동 해안 지역과 덕산동 일대에 항공기의 제조와 수리를 위한 해군 항공창을 건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