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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11
한자 海岸防衛-最前線-忠武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술

[정의]

임진왜란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안 지역에서 전개된 충무공 이순신의 활약.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안 지역은 고대로부터 창원·김해 지역과 해외를 연결하는 접촉 통로 역할을 하였다. 가락국 허황후가 탔던 배가 진해구 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시대에는 왜구가 처음으로 침략해왔던 지역이다. 조선 시대 초기부터 진해구 해안에 수군 관방과 왜관이 설치된 것은 이곳이 해안 방위의 최전선이었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빛나는 활약이 진해구 해안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제포 수군진성]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웅천 읍성(熊川邑城)에서 남쪽으로 바닷가에 이르면 진해구 제덕동 제덕리[일명 안지개]가 있는데, 제덕리는 과거에 경상도 우수군의 본영인 경상수영(慶尙右水營)이 있던 자리이다. 제덕리는 조선 초기에 내이포(乃而浦)로 불리다가 1452년(단종 즉위) 이후에는 제포(薺浦)로 명칭이 바뀌었다.

원래 내이포를 관할하던 웅신현(熊神縣)[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던 옛 고을 이름]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1227년(고종 14)에 별장(別將)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고려 말에는 내이포에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03년(태종 3)에는 내이포에 경상우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영(慶尙右道水軍都按撫處置使營), 곧 경상 우수영이 설치되어 처치사가 낙동강 하구를 기준하여 경상도 서쪽 해역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내이포가 왜선들이 출입하는 입구로서 웅천·창원의 해안 방어와 마산포의 조운(漕運)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내이포의 경상 우수영은 1419년(세종 1)에 거제도 오아포(吾兒浦)[현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의 조선 전기 명칭]로 옮겨졌고, 내이포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다가 뒤에 수군 만호로 강등되었다. 제포 수군 만호진은 1895년에 구군제(舊軍制)가 혁파될 때 폐진되었다.

조선의 국법은 수군이 항상 배를 타고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성종 대에 이르러 이러한 선상수어(船上守禦) 제도가 완화되고, 각 포에는 성을 쌓아 수군을 주둔시켰다. 1485년(성종 16)에 우의정 홍응(洪應)[?~?]이 사도순찰사(四道巡察使)가 되어 축성 예정지를 간심(看審)하였는데, 삼포(三浦)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 22개의 수군영진(水軍營鎭)에 축성하기로 하였다. 제포 수군진성은 1486년(성종 17) 10월에 완성되었는데, 길이 4,316.3척(尺)[1,308m], 높이 13척[3.9m]이었다.

제포 수군진성은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제덕리의 낮은 야산 서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로부터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까지 축조되었는데, 자연대석(自然大石)으로 이중 기단(基壇)을 조성하고, 동쪽·서쪽·북쪽에 옹성형 문지(甕城形門址)를, 성벽의 요소요소에는 곡성(曲城)을 두었다. 또한 외부에는 적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하여 깊이 5m 내외, 폭 5~9m 내외의 도랑, 곧 해자(垓字)를 둘렀다. 성 내에는 동헌(東軒)·진교청(鎭校廳)·진무청(鎭撫廳)·사부청(射夫廳)·포수청(砲手廳)·사령청(使令廳)·군기고(軍器庫) 등의 공해(公廨)가 있었다. 또 어변정(禦邊亭)·회원루(懷遠樓)·조종각(朝宗閣)·수항루(受降樓) 등의 누정(樓亭)이 있었다.

[해안 방위의 최전선]

창원시 진해구 해안 일대는 제덕 토성(薺德土城)·안골포진(安骨浦鎭)·제포진(薺浦鎭)·청천진(晴川鎭)·신문진(新門鎭)·풍덕진(豊德鎭) 등 수군 관방(關防) 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이 지역이 조선 시대 해안 방위의 최전선이었음을 보여준다.

제덕 토성제포진[제포 수군진성]과 근접하여 진해구 제덕동 제덕리 동쪽 뒷산에 있다. 조선 초기에 제포·부산포·염포의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두면서 상주(常住)하는 왜인을 60명으로 제한하였다. 일반적으로 왜관의 외부에는 목책(木柵)을 두르고, 다시 밖에 성을 쌓아 일반 주민과의 접촉을 차단하였는데, 제덕 토성도 이러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제덕 토성의 축성 연대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507년(중종 2)에 조선 정부가 삼포에 축성하기 위하여 성터를 측량하자 거주하던 왜인들이 축성을 중지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병조(兵曹)와 축성도감(築城都監)에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남아있는 제덕 토성의 규모는 길이 340m, 높이 3.5m이며, 성벽 기단부는 5m 정도이다.

안골포진은 제포진 동쪽의 진해구 안골동에 있다. 가망포(加望浦)[현 창원시 진해구 제포와 부산광역시 다대포 사이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수군진]에 있던 수군 만호진을 1462년(세조 8)에 안골포진으로 옮겨왔다. 안골포진성은 수군의 방어 원칙이던 선상수어(船上守禦)를 완화하여 남해안 일대 각 포에 축성하기로 결정한 후 적량성·지세포성·사량성·영등포성과 함께 1490년(성종 21)에 축성되었는데, 둘레가 1,714척(尺)[519m]이고, 높이는 13척[3.9m]이었다. 그 후 안골포진은 임진왜란으로 왜군에게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전란 후에 복구되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때 함락되었던 가덕진(加德鎭)·천성보(天城堡)·제포진이 부활되어 한동안 안골포진에 머물다가 각각 본래 위치로 복귀한 적이 있다. 현재 안골포진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남벽 일부와 서벽의 기단부 일부만 남아있는데, 임진왜란으로 이 성이 함락되고 바로 옆에 왜성이 축조되면서 안골포진성의 석축을 헐어내어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골포진의 전선이 정박하였던 굴강(掘江)[해변에 돌무더기로 방파제를 둘러 쌓아 배를 정박시키던 곳] 유적 일부가 현재 마을 해안 도로변에 남아있어 안골포진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안골포진으로부터 동·서 각 0.8㎞ 지점에 임진왜란청천진과 신문진이 설치되었다. 청천진은 본래 김해 청천면에 있던 청천 소모진(召募陣)[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이 1656년(효종 7)에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청천 마을로 옮겨왔다. 신문진은 본래 김해 유하면에 있던 신문 소모진[현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신문리]이 1657년(효종 8)에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으로 옮겨왔다. 청천진과 신문진에는 종9품의 별장(別將)이 거느리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좁은 안골만에 안골포진을 포함하여 세 개의 수군진이 촘촘히 배치된 것은 이곳이 국방상의 요해지였기 때문이다. 청천진과 신문진은 대체로 1864년(고종 1) 전후에 폐진되었으며, 현재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풍덕진은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바닷가에 있었다. 『웅천현 읍지(熊川縣邑誌)』에 따르면 본래 별장이 주둔한 소모진이었으나, 1606년(선조 39)에 수군 기지가 되었다. 그 후 1669년(현종 10)에 사포(蛇浦)[사포의 위치는 자세하지 않음]로 옮겼다가 1750년(영조 26)에 경상도 관찰사 민백상(閔百祥)[1710~1761]의 건의로 폐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1751년(영조 27)에 폐진된 것으로 전한다. 풍덕진에는 종9품 별장이 거느리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풍덕진이 위치하였던 풍호동 바닷가는 현재 군사 기지로 바뀌어 옛 유적지는 모두 사라졌다.

[합포 해전]

합포 해전은 임진년(壬辰年)[1592] 5월 이순신의 제1차 출전 때 있었던 옥포·합포·적진포 해전 가운데 두 번째 해전을 일컫는다. 이순신은 “웅천 땅 합포[熊川地合浦]”라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말하는 합포는 마산의 옛 지명인 ‘합포’가 아니라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에 있는 합포로 일명 ‘학개’로도 전한다.

임진년 4월에 이제까지의 왜구와는 다른 대규모의 왜군이 쳐들어오자 경상도 좌·우수군과 육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왜군은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이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전선[판옥선]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을 거느리고 5월 4일에 여수의 전라 좌수영을 출발하여 경상도 해역으로 제1차 출전을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당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삼덕포의 옛 이름]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1540~1597]과 만나 원균에게서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원균이 거느리는 전선 4척 및 협선 2척과 합세하였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주도하에 거제도 남단을 돌아 계속 진격하였으며, 5월 7일에 옥포(玉浦)[현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의 옛 이름]에서 왜선 30여 척을 만나 그 중 26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옥포 대첩 후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진격하였으며, 그날 밤을 보내기 위하여 거제도 북안 영등포(永登浦)[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의 옛 이름]에 정박하였다. 이 때 척후장(斥候將)이 왜 대선 5척이 앞 바다를 지나간다고 급히 보고하므로, 이순신은 모든 함선을 거느리고 왜선을 추격하였다. 왜선들은 불리함을 깨닫고 급히 북쪽의 합포[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합포]로 상륙하여 도망하므로 우리 수군들은 적 함선을 모조리 격파하고 불태워버렸다.

합포 해전의 승리는 옥포 대첩에 연이어 조선 수군이 거둔 쾌거였다. 합포 해전 다음 날에도 조선 수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적진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조선 수군이 이렇게 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통솔력, 함재(艦載) 화기로서 각종 총통의 보유, 판옥선의 우수성을 들 수 있다.

[안골포 해전]

안골포 해전은 1592년 7월 10일과 11일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1561~1597] 그리고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서 왜군과 접전을 벌인 해전을 일컫는다.

안골포 해전에 앞서 이순신은 이미 5월과 6월에 두 차례 출전하여 옥포 해전 등을 비롯한 일곱 번의 큰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모두 110여 척의 왜선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군 수뇌부는 조선 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그들의 수군 주력부대를 출동시켰다. 이리하여 7월 8일에 이순신이 이끄는 58척의 조선 수군과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1554~1629]가 거느리는 73척의 왜군 주력 함대 간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졌고,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59척의 왜선을 격멸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한산 대첩 후 조선 수군은 왜선을 찾아 가덕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수색한 결과 안골포에 왜선이 정박 중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 왜선들은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후원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출동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1542~1600]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1562~1631]가 거느리는 40여 척의 함선이었다.

7월 10일에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단의 온천도(溫川島)[현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의 조선 시대 별칭]를 출발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였으며, 작전 계획은 이순신 함대가 학익진(鶴翼陣)으로 포구의 왜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 함대는 안골포의 바깥바다를 경계하면서 전투가 벌어지면 복병을 남겨두고 전투에 합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골포 포구는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나므로 판옥선과 같은 대선은 출입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왜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한산도 해전에서 동료 함선들이 거의 전멸당한 후라 왜군들은 포구 밖으로 결코 나오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종일토록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과 장전(長箭)·편전(長箭) 등을 쏘아 적을 사살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은 화공(火攻)으로 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하였으나, 궁지에 몰린 적이 잠복해 있는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하여 화공을 중단하고 1리[400m]를 물러나와 밤을 보냈다.

7월 11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안골포로 진격하였으나 살아남은 왜군들이 밤에 몰래 함선을 끌고 달아나버렸다. 이순신은 부산 방향으로 진격하여 낙동강 하구 일대를 모두 수색하였으나 적선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고 함선을 정비하기 위하여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13일에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갔다.

안골포 해전의 승리는 한산 대첩과 더불어 당시 평양까지 진격하여 발이 묶인 왜군이 수륙 병진 전략(水陸竝進戰略)으로 해로를 통하여 병력과 물자를 보급 받아 계속 진격하려는 의도를 분쇄함으로써 그들의 조선 점령 전략을 좌절시킨 의미 있는 승리였다. 또한 당시는 아직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제도가 시행되기 전으로, 세 개의 조선 함대는 모두 독립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며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장수의 지휘 통솔력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웅포 해전]

웅포 해전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이 웅포(熊浦)[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사도 마을 사이에 있는 포구]를 점거하고 있던 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 사이에 접전을 벌였던 해전을 일컫는다.

당시 조선 수군이 부산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웅포를 점거하고 있는 왜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그런데 왜군은 임진년[1592]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로부터 “조선 수군에게 대응하지 말고 수성(守城)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형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포구에 은거하여 해상 전투를 회피하였는데, 왜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웅포가 바로 그러한 포구였다.

1593년 2월과 3월에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주도로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웅포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포구에 깊숙이 정박한 왜선을 완전히 격멸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순신은 온갖 방책을 동원하여 왜선을 큰 바다로 유인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그가 모집하여 거느리고 있는 의승병(義僧兵)과 각 함대에서 차출한 용감한 군사들을 나누어 웅포 동쪽의 안골포, 서쪽의 제포에 각각 상륙시켜 왜군을 육지의 배후에서 위협하고, 또 산비탈의 왜군 진지에 우리 함선으로부터 중완구(中碗口)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며, 위계책(僞計策)으로 왜선을 바다로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여전히 포구에 은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순신은 최후 수단으로 화공(火攻)으로 왜선들을 불태워버리고자 화선(火船)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함선을 상실하여 궁지에 몰린 왜군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화풀이하면 그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화공을 중단하였으며, 4월 3일에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갔다.

웅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술적으로 불리한 여건으로 인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하였으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에서 평화로]

임진왜란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 하겠으나 실상은 우리의 전 국토가 유린된 참담한 승리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군사 지원과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의 봉기 그리고 해전에서 조선 수군들의 빛나는 활약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전란 후 도래한 해상의 평화는 그 후 3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왜구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러한 평화는 일본 내의 ‘해적 정지령’과 같은 원인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왜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창원시 진해구 지역은 전란 기간 내내 왜군들에게 점령되어 조선 수군의 부산포 진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왜군들은 진해구 해안에 위치한 웅천 남산[184.3m], 안골포 동망산[68m], 명동 사화랑산[195m] 서쪽 능선에 각각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이러한 왜성 유적들은 진해 지역이 침략한 왜군들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진해 지역은 우리에게도 국방의 요충지로서 이미 조선 초기부터 내이포[제포]에 경상 우수영이 설치되었던 것이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많은 수군진이 해안 지대에 설치되었다.

오늘날 창원시 진해만은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청’이 대대적인 매립 공사를 벌여 신항만과 공업 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하는 첨단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옛날 해안선의 모습이 사라지고, 역사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 민족으로서 오랜 역사의 유산들을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특히 이 지역의 해안 방위 유적들은 역사 교육의 도량으로서의 역할이 지대하므로 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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