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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15
한자 -文庫-展示-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원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1월 24일 - 데라우치 문고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현 소장처 경남 대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지도보기
원 소재지 야마구치 현립 대학 - 일본 야마구치현

[경남 대학교 소장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의 정의]

데라우치 문고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있는 경남 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1996년 1월에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으로부터 기증 받은 조선 관계유물로, 모두 98종 135책 1축[개별 점수로는 편지와 시, 글씨, 그림 등 총 1,959점]에 이른다. 이들 유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들 중 일부이다. 유물은 일괄적으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0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중 『기원유한지예서첩(綺園兪漢芝隸書帖)』은 보물 제16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는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데라우치 문고’란 무엇인가?]

1996년 1월 24일 우리나라의 각 언론들은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 데라우치 문고에 소장되어 있던 한국 관계 문화재 중 일부가 경남 대학교로 반환된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이들 문화재는 우리의 국권이 침탈당한 시기에 해외로 유출된 것들로, 80년 만에 고국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데라우치 문고’, 그것은 무엇인가?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이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로 강제 유출되었다는 개략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었지, 그들 유물에 대한 실체나 현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데라우치 문고는 그 명칭부터 생소하게 여겨졌다. 데라우치 문고의 주인공인 데라우치는 조선 제3대 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를 말한다.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그는 누구인가?]

데라우치는 근대 일본의 정치를 주도한 죠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 서부] 출신의 대표적인 군인 정치가이다. 죠슈번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발상지로서 유신의 주역이자 일본 군국주의를 이끈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카쓰라 테로우[桂太郞] 등을 배출한 곳이다. 이들은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지역적 특성을 배경으로 마사다케는 어린 시절부터 군에 투신하여, 죠슈번 출신의 군부를 배경으로 군인 정치가로 출세하였다. 특히 그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과정에서 군수(軍需)를 책임지며 철도·통신 분야 등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우리나라의 경부선·경의선 건설이나,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설립 등은 그의 대표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마사다케는 그의 지역적 배경과 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한반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조선에 대한 지식과 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제3대 통감에 부임하였고, 통감으로 부임한 지 2달 만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소멸시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마사다케는 곧바로 조선총독에 임명되어 식민지 통치의 토대를 조성하였다. 마사다케의 식민 통치는 이른바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武斷統治)’이다. 그는 헌병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언론과 교육을 통제하였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말살 정책을 꾀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10~1915년 각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실행한 문화재 조사 사업이다. 조사 대상에는 한반도 내 모든 문화재가 포함되었다. 조사 명목은 조선 고래(古來)의 문화재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의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고 일제 동화(同化)를 통한 식민 지배를 영구히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훼손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야마구치 현립 대학 데라우치 문고 내에 소장된 한국 관계 자료 중 일부는 이 과정에서 유출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라우치 문고의 설립과 성격]

원래 명칭이 ‘오우호 데라우치 문고[櫻圃寺內文庫]’인 데라우치 문고는 데라우치가 그 기초를 확립하고, 데라우치의 아들 히사이치[壽一]가 완공하여 운영한 사설문고이다. 현재는 야마구치 현립 대학 도서관 2층 개인 기증 문고실에 소장되어 있다. 문고에는 한국 관계 자료를 포함하여 중국·일본의 고전적 1만 8000여 점이 수장되어 있다.

데라우치 문고가 설립된 것은 1922년이다.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마사다케는 일본 총리대신을 역임(1915~1919)하였다. 그러나 병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아들 히사이치를 불러 문고의 개설을 희망하였다. 1919년 11월 마사다케가 사망하자 히사이치는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1920년 5월 13일 마사다케의 본향[山口縣 吉敷郡 宮野村]에다 콘크리트 2층 건물의 문고 공사에 착공하여 이듬해 11월8일에 부속건물 조선관(朝鮮館)과 함께 완공하였다. 문고 개관은 마사다케의 생일에 맞춰 1922년 2월 5일에 거행하기로 하고, 명칭을 ‘오우호 데라우치 문고’라고 정하였다. ‘오우호[櫻圃]’는 데라우치의 고향 미야노[宮野]에 있는 벚꽃 동산[櫻畠]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런데 마사다케가 문고를 개설하려고 한 데는 동향의 군인이자 사돈이었던 코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1852~1906]의 영향이 컸다. 코다마는 1903년에 고향 도쿠야마[德山]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코다마[兒玉] 문고’를 열고, 강연회와 독서 활동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마사다케는 코다마 문고의 평의원으로 그 운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도 고향에 개인 문고를 설립하려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마사다케가 태어난 곳은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이다. 따라서 그는 지역적 자부심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선배들의 업적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문고 개설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데라우치 문고는 개관 당시부터 일반 도서관과는 달리 특수한 성격으로 출발하였다. 그것은 마사다케 개인의 역사관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인데, 그는 “역사를 알아야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웃한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취지는 그가 죽기 직전인 1918년 8월에 미리 작성해 둔 「오우호 문고기(櫻圃文庫の記)」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

“[전략] 사기(士氣)를 불러일으킴은 역사보다 좋은 것이 없고, 역사를 수집함에 있어 먼저 우리 제국의 역사를 날줄로 하고,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조선과 중국의 역사를 씨줄로 삼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오우호 문고를 창설하는 주된 이유이며, 다른 일반 도서관과 스스로 그 취지를 달리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패사소설(稗史小說)을 읽어 인심을 즐겁게 함은 없고, 또 시세의 추이를 반영한 근간의 서적은 부족하다. 대개 나의 의도는 널리 많은 사람들의 탐독을 바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향당 자제(鄕黨子弟)의 정신적 각성을 꾀하는 데 있다. 서적을 열람하는 이들이 다행히 나의 작은 뜻[微意]을 잘 헤아려 시간을 내어 연찬하는 바 있으면 실로 내가 영광으로 삼는 바로다.”

위의 사실로 볼 때 마사다케는 자료수집 단계부터 이미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뜻은 히사이치가 문고를 설립할 때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 ‘오우호 데라우치 문고 규칙[櫻圃寺內文庫規則]’에는 향후 자료를 수집할 때 “주로 일본·중국·조선의 사적을 수집하고, 그 밖의 유익한 내외의 도서를 수장”[제2조]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문고는 개관과 함께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운용도 꽤 잘되었던 것 같다. 문고는 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그 운영을 위해 데라우치가[寺內家]에서 거금을 내어 로안 재단(魯庵財團)[‘로안’은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호號]을 만들었다. 재단 운영은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한 평의회가 담당하였으나 실제 책임은 데라우치가에서 쥐고 있었다.

그런데 1945년 종전과 동시에 히사이치가 사망하면서 문고 운영이 매우 어려워졌다. 때마침 1941년 2월에 문고에 인접하여 야마구치 여자 전문학교[山口女子專門學校][현 야마구치 현립 대학]가 설립되었다. 당시 여전은 도서관 건물을 확보하지 못해 건물 한 모퉁이를 도서관으로 사용하였지만 불편이 많았다. 때문에 문고 이용객 중에는 자연 학생들 수가 증가해 갔다. 학교 당국에서는 문고를 학교도서관으로 이용하기 위해 데라우치가에 문고 임대를 요청하였다. 데라우치가 역시 문고 운영의 어려움도 있고 하여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46년 12월 1일자로 데라우치 문고의 본관 건물과 부속 건물[조선관]은 여전히 도서관으로 10년간 임대한다는 ‘오우호 문고 대차 계약서[櫻圃文庫貸借契約書]’가 작성되었다.

계약 만기가 도래할 즈음 대학[야마구치 여자 전문학교는 1950년 야마구치 여자 단기 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됨] 측에서는 문고를 영원히 이용할 것을 희망하며 재차 데라우치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 1월 22일 토지와 건물에 대한 매매계약이 체결됨으로써 문고의 건물과 토지는 대학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3월25일에는 도서 19,036책을 비롯한 일체 비품 등을 데라우치가가 기부채납의 형식으로 대학에 기증함으로써 데라우치 문고는 완전히 대학의 소유로 이관되었다.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왔는가?]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의 데라우치 문고에는 한국 관계 자료가 모두 1,000여 종 1,5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라우치 문고의 일부 유물이 경남 대학교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데라우치 문고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다만 박경식(朴慶植)이 “데라우치 등이 약탈한 2,000여 점의 고분 출토 유물과 고서(古書)·회화(繪畫) 등이 현재 야마구치 현립 여자 대학[山口縣立女子大學] 도서관에 있다.”고 한 것이 유일한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고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 중 일부나마 경남 대학교로 되돌아오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선조의 진적을 찾으려는 한 가문의 노력과 해외 유출 문화재 환수에 대한 경남 대학교의 의지가 있었다.

1990년 퇴직 공무원이었던 이종영은 여가를 이용해 종친회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월간 잡지 『서예지(書藝誌)』[1974년 9월호]를 통해 고려 시대 송설체(宋雪體)의 대가이자 선조인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 선생의 진적(眞蹟) 두 점이 데라우치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종영을 비롯한 고성 이씨 종친회에서는 행촌 선생의 진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당시에는 데라우치 문고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종영은 일본의 지인을 통해 그 장소부터 확인하였으나, 7개월 후에야 그것이 일본 야마구치 현의 대학에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종영은 데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또 거기에는 행촌 선생의 진적 외에도 엄청난 양의 한국 관계 전적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국한 이종영은 당시 국사 편찬 위원회 박영석 위원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소식을 접한 박영석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 존재를 확인하였다. 박영석은 데라우치 문고의 존재와 그 안에 소장된 유물을 확인하고 “이렇게 ‘포로’로 잡혀온 것도 억울한데, 거기다 암[좀이 먹은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까지 걸린 것을 보니 마음이 주저앉는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되찾아 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 후손의 의무임을 깨닫고, 귀국 후 국회 한일 친선 협회와 한일 의원 연맹 등을 통해 공식적인 반환을 꾀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번 약탈·반출한 문화재를 본국으로 되돌려준 예는 찾기 힘들었다. 때문에 반환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때마침 경남 대학교는 1996년 개교 5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이에 당시 박재규 총장을 비롯하여 학교 당국은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일본 소재 한국 유물에 대한 탐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많은 것들이 모조품이고, 간혹 진품으로 확인된 것들도 찾을 길이 막막하였다. 그러던 중 박재규 총장 일행은 1994년 일본 나리타[成田] 공항에서 우연히 한일 의원 연맹 소속의 한 국회의원을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는 경남 대학교가 민간의 학술교류 차원에서 이 사업을 성사시켜 보기로 하였으며, 향후 필요한 도움을 약속받았다. 당시 경남 대학교는 대학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과 학술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데라우치 문고 반환 사업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경남 대학교는 국회 한일 의원 연맹과 한일 친선 협회 등의 도움을 받으며 데라우치 문고 환수를 위해 전면에서 야마구치 대학 측과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1995년 11월 11일 양측은 학술 교류 증진을 위해 데라우치 문고 중 일부[98종 136점]를 기증 형식을 통해 경남 대학교에 양도한다는 기증 각서의 조인식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월24일에는 각서에 입각한 97종 135점이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1점은 훼손이 심하여 야마구치 대학 측에서 전문가를 동원하여 보수한 후 1996년 4월 27일 양교의 학술 교류 협정 및 경남 대학교 사내 문고 특별 전시실 개관일에 맞추어 되돌아왔다]. 이는 조선 말~일제 시기에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 중 최초로 민간 차원에서의 대규모의 환수란 점에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유물들이 돌아왔는가?]

이번에 귀환된 유물들은 모두 98종 136점[135책, 1축] 1,595건이다. 이들 중 일부는 전시를 통해 이미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또 일부는 『한마 고전 총서』라는 자료집을 통해 각 도서관과 박물관 등에 배포됨으로써 연구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남 대학교로 돌아온 135권의 책 속에 실린 인명수는 대략 1,000명에 달하고, 각 첩에 실린 편지나 시, 그림, 글씨 등은 1,959건[이 숫자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연구 결과에 따라 증감이 있을 수 있다]에 이른다.

이번에 돌아온 유물들은 주로 조선 후기인 17~19세기의 간첩(簡帖)·시첩(詩帖)·서화첩(書畵帖) 종류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유물은 당시 문화재 위원이었던 고(故) 임창순을 비롯하여 전문가들이 직접 선별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고 탁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들로 보관 상태 또한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이 중 신라 시대의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그리고 조선 시대의 안평 대군(安平大君),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을 비롯한 220여 학자들의 글씨를 모은 『명현간독(名賢簡牘)』은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무진조천별장첩(戊辰朝天別章帖)』『정해부연별장첩(丁亥赴燕別章帖)』은 1628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즉위식 참석을 위한 진하 부사(進賀副使)로, 또 1647년에는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방문하는 민성휘(閔聖徽)를 송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모은 시첩이다. 이 두 첩은 명과 청의 왕조 교체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의 중국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순조(純祖)효명 세자(孝明世子)[뒤에 익종으로 추대]가 1817년 시강원(侍講院)에 입학하는 장면이 담긴 『정축입학도첩(丁丑入學圖帖)』, 1769년 청계천 준설 후 그것을 기념하여 만든 『제신제진(諸臣製進)』 등 궁중 의례에 관한 것들과 김홍도(金弘道)·홍득구(洪得龜) 등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홍운당첩(烘雲堂帖)』 역시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6~18세기 사대부들의 편지를 모은 『근유첩(近儒帖)』·『간독첩(簡牘帖)』·『고간첩(古簡帖)』 등은 문화재적 가치와 사료적 가치를 두루 지닌 것들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예서에서의 3대 명필로 꼽히는 유한지(兪漢芝)의 예서를 모은 『기원유한지예서첩(綺園兪漢芝隸書帖)』을 비롯하여, 성수침(成守琛)·이황(李滉)·이항복(李恒福)·한호(韓濠)·서성(徐渻)·허목(許穆)·송준길(宋俊吉)·이광사(李光師)·김정희(金正喜) 등 당대를 풍미한 대학자 혹은 명필가의 개인 법첩 등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환수 데라우치 문고의 가치와 의의]

조선 시대 말과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들은 외세의 약탈 대상이 되어 해외로 유출되었다. 이번 경남 대학교 박물관으로 환수된 ‘데라우치 문고’의 일부는 국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의 환수를 위한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국제간의 학문적 교류, 나아가 국가 간의 관계 교류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특히 야마구치 대학 측은 자신들이 소장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국에 이 같은 자료가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증하게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속적인 문화재 환수 사업은 한·일 양국 간의 공동 연구를 위한 학문적 교류는 물론이며, 나아가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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