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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0
한자 朝鮮-三大魚市場-馬山魚市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경미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일대에 있는 수산물 시장.

[개설]

마산 어시장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남성동·동성동·신포동에 걸쳐 있다. 어시장은 좁게 본다면 수산물을 팔고 사는 상행위를 하는 장소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위탁 판매와 경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포함한다. 마산 어시장은 동서 방향으로는 옛 중앙 청과 시장에서 오동동 복골목까지이며, 남북 방향은 해안까지이다.

어시장은 냉동 어류·선어류·패류·해초류·활어·건어물·젓갈 등은 물론 과채류·돼지머리·닭·떡·식품류·의류·그릇·얼음·소금·어상자 등도 판매하는 종합 시장이다. 하지만 그릇이나 의류 등의 공산품을 판매하는 비중은 극히 낮고, 어패류와 채소 판매가 중심인 시장이다. 특히 어패류의 판매 및 비중이 높아 수산물 시장으로 이름이 높다.

마산 어시장은 조선 시대 마산창이 설치되면서 만들어졌으며,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마산포장[1809], 마산 시장[1907년], 구마산 시장[1912·1926·1931·1938·1953·1967], 부정 공설 시장[1926], 마산 어시장[2013] 등으로 개칭되었는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어물의 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 마산 어시장 : 마산포장의 형성 배경과 시장의 발달]

조선 시대의 시장은 육로를 중심으로 한 장시와 해로를 중심으로 한 포구 두 가지 형태로 발달하였다.

마산 어시장마산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장으로 발달하였다.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였던 마산포가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공납을 쌀로 받는 대동법의 실시 때문이었다. 1760년(영조 36)에 설치한 마산창으로 인근의 대동미가 마산포로 집결되면서 마산포에는 인근 지역의 관원은 물론 객주, 여각, 경강상인을 비롯한 각지의 상인, 이웃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로 바다를 통한 전국적인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육로의 장시와 연결되어 더욱 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번성한 마산포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 후기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을 남해안 최대의 상업 도시로 변모시켰다. 당시 마산의 인구가 7,898명으로 창원부의 다른 면의 인구보다 1,800~3,500명 정도 많았을 정도였다. 창원에는 마산포 외에도 지이포·사화포·합포·여음포가 있었지만, 수천 척의 선박이 정박 가능한 마산포가 중심 포구로서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해상 유통의 중심 포구로서 기능을 담당하였다.

마산포의 시장권은 마산창의 관할 구역이었던 창원·함안·칠원·거제·진해·웅천·의령 동북면·고성 동남면 등이었다. 이들 지역의 곡물과 기장·울산·평해·강릉·영해·함흥 등지의 어물과 마포가 유통되었다. 특히 원산포에 집하된 북어가 마산포를 경유하여 충청도 은진 강경포까지 유통된 것을 볼 때 마산포가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외에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도 경상도의 해상 유통의 중심지로 들 수 있지만 마산포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 포구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구마산 시장 : 5일장에서 상설 시장으로]

조선 후기 마산장은 매월 음력 5일·15일·25일에는 샛강[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어시장 부근]에서, 10일·20일·30일에는 구강[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용마산]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쌀·보리·콩·조·면화·어류·마포·모시·비단·종이·유기·소·과실·연료·호초석 등 다양한 물품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산장의 규모는 매우 컸다. 1800년대 말 마산 선창의 객주는 130여 호였고, 1890년에는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마산장부정 공설 시장[현 부림 시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상설 시장이 되었고, 이에 따라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새강과 구강 두 곳에서 열리던 5일장이 샛강[어시장] 한 곳으로 모아지면서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부정(富町)[부림동]·수정(壽町)[수성동]·원정(元町)[남성동]·만정(萬町)[동성동]·석정(石町)[창동] 등의 도로에 수많은 난전이 열려 평일에도 부정 공설 시장과 연결되어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5일·10일의 장날에는 인근에 있는 장꾼과 장 보러 나온 인근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림 시장과 어시장이 별도의 시장이 되는 계기는 합포로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림 시장은 의류·채소·과일·식품·과자·식기 등의 일용 잡화 시장이 되고, 어시장은 생선·건어물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어시장은 현재 건어물상이 밀집된 동굴강과 어선창에서 부림 시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마산부로 승격되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마산장은 또 한 번의 획기적 발전계기를 맞게 되었다. 통영 등의 인근 어촌의 수산물이 마산의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면서 마산장의 주요 물품으로 수산물이 차지하게 되었다. 어종은 대구·청어·정어리·멸치·갈치·새우·명태·문어·해삼·성게였으며, 대부분 말리거나 염장한 수산물이 거래되었다.

[구마산 시장에서 유통되던 대구와 북어포 그리고 멸치]

대구와 북어포는 구마산 시장의 대표적인 어물이었다. 대구의 경우에는 동지에서 대한 사이에 주로 진해만에서 잡았는데, 연간 어획고 300만~500만 마리 중 120만 마리가 마산포를 통해 거래되었다. 성어기가 되면 어항에서 매축지까지 대구가 쌓여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구마산 역에는 전국 13도로 운송될 대구가 산적해 있었다고 한다.

마산이 명태의 산지가 아니었지만, 동해 북부에서 잡은 것을 들여와서 북어포를 가공하여 판매하였다. 마산에서 만들어진 북어포는, 조선인이 만든 명태어 주식회사가 창녕·의령·삼가·합천·진주·사천·고성 등 경남 일대의 유통을 담당했다. 이 회사가 연간 취급한 수량은 약 1천 톤에 달하며, 1톤에 900원 내외로 잡는다면 100만 원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1929년 마산만의 수산물 거래액이 연간 500~600만 원으로 추정할 때 북어포 거래가 마산의 주요한 거래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상거래를 주도한 상인인 건어물 객주의 경우 마산을 대표하는 객주로 ‘멸치 객주’라 할 만큼 멸치가 유명했다. 건어물점에는 멸치 이외에도 명태·대구·가자미·도미·갈치·문어·상어·가오리·해삼·전복·대합·새고막 등을 팔았다. 1924년 4월에 건어물을 경매하기 위해 40여 명의 조합원이 ‘마산 전온 판매 조합’을 설립하였다. 여기서 경매되는 어종은 멸치·볼락·새우가 주 품목이었다. 1944년 마산 수협의 전신인 마산 어업 조합이 설립되었다. 마산 어업 조합에는 위판 시설을 기반으로 74명의 중매인과 30여 명의 객주가 자금 선대업을 하였다.

[마산 어시장의 성장 : 부림 시장과 마산 어시장의 분화]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마산 어시장은 급성장을 하게 된다. 이는 임해 공업 단지로 발전하던 마산의 성장과 맥을 함께했다. 1966년 한일 합섬, 1967년 한국 철강, 1970년 임해 공업 단지 조성, 1973년 창원의 대단위 기계 공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당시 인구 밀도가 서울 다음으로 2위였으며, 경제 성장 역시 380~503%로 매우 높았다. 마산 어시장부정 공설 시장부림 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며 경남 서부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급성장한다. 당시 부림 시장마산 어시장은 합포로의 개통으로 나뉘어 부림 시장은 일용 잡화·식품·의류·채소·과일·과자·식기·도자기 등 종합 시장으로, 마산 어시장은 생선·건어[멸치]·과일·식품 시장으로 성장한다.

마산 어시장부림 시장의 내부 구조 및 공간의 변화는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부림 시장 화재 때문이었다. 이 두 번의 화재로 어시장의 내부 구조가 변하여 시장의 양끝에 어업 조합과 청과 조합이 위치가 바뀌고 골목 시장이 형성되었다.

1. 청과 조합의 이전과 어물과 청과 시장의 확보 : 부림 시장 화재

일제 강점기 마산부는 시장 규칙에 따라 제3호 시장의 하나인 부영 청과 시장을 1941년 5월 11일에 개장했는데, 마산부에서 직영을 하지 않고 마산 청과 시장 주식회사에 운영을 대행시켰다. 마산 청과 시장 주식회사는 1940년 11월에 자본금 19만 엔으로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회사이다. 1948년 마산 청과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위탁 업무를 하게 된다.

1973년 부림 시장의 화재로 현재 강남 극장 서쪽 옆에 있던 마산 청과 주식회사가 어시장으로 옮기게 된다. 창동부림 시장에 상권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과물 상점의 이전이 필요하여 어시장으로 공간을 이전하게 된 것이다. 부림 시장은 당시 철로를 중심으로 웃 시장과 아랫 시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웃 시장은 청과와 과자류, 아랫 시장은 옷전이 중심이었다. 아래 시장의 옷전은 미제 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산 청과 주식회사가 이전한 후 어시장은 어업 조합과 청과 조합이 양단에 위치하여 그 사이에 상권이 형성되었다. 다른 품목의 가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어시장은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한 어시장은 가게들이 밀집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하기를 꺼렸고, 부림 시장에서 식품 가게를 하던 가게들이 이전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79년 29개로 출발했는데 2002년 현재 33개 이상이 된다.

청과 조합이 내려오기 이전에는 ‘어업 조합’과 ‘산고기 조합’을 중심으로 한 시장이 공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어업 조합[큰 판장]’ 근처의 건어물상, ‘산고기 조합[작은 판장]’ 근처의 생선 가게, 돼지 골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돼지 골목은 다른 골목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곳은 합포로에 지하도가 생기기 이전까지 부림 시장에서 어시장으로 통하는 중앙 도로이며, 돼지 머리·돼지 국밥 등을 판매하는 가게가 밀집하고 있다. 그리고 ‘산고기 조합’ 근처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현재 약초 골목 인근에는 당시 용마 철공소·대륜 철공소 등이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어구나 그물을 파는 선구점, 어구 만드는 곳, 목공소 등이 모여 있었다. 철공소는 동성동오동동 경계, 산호동 일부의 해안가에 많았다. 마산이 임항 도시임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철공소는 1970년대 초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2. 골목 시장의 형성

마산 어시장의 양끝에 어물전과 청과물전이 자리를 잡고 골목 시장이 형성되면서 짜임새 있는 시장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어시장 내에서 공간의 변화가 생긴 시기는 1970년대였다. 대풍 골목과 진동 골목, 홍콩바, 충무 야채 골목[유람선 골목]이 만들어지고, 어시장 내 도로 중앙에 좌판이 상설로 자리 잡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홍콩바를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의 진동 골목은 6·25 전쟁 무렵에는 일본인 가정집이 늘어서 있었고, 진동 골목 가운데는 하천이 흐르고 있어 그 위에 놓인 판자 다리를 통해 건너갈 수 있었다. 이후 이곳이 복개되면서 집 앞자리의 사용권은 집주인이 가지게 된다. 복개 이후 ‘제2판장’이나 다른 어물을 파는 난전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자 가정집을 철거하고 점포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점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고, 1960년대에는 진동 골목이 있었다. 진동 골목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현이나 진동에서 어물 상인이 이곳으로 많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진동 어판장 경매인 2~3명, 나머지 4~5명, 고현 어판장 경매인 6명, 나머지 7~8명이었다. 현 진동 골목에서 한독 약국에 이르는 공간은 정미소 자리였다. 그 자리에 십자형의 도로를 만들고, 상가를 만들어 1986년 4월에 분양하였다. 당시 정미소 주변에 난전을 하던 상인들이 분양을 받아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진동 골목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주로 아낙네들이 진동·고현 수협에서 위판한 고기로 장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통나무함[통대]에 생선을 담아 와서 판매했다. 진동 골목 내에 상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야채 골목의 진동 골목이 어물전으로 변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이다. 현재는 떡, 건어물, 선어, 활어, 전복 및 패류, 냉동 어류를 판매하지만 대부분 냉동 어류를 소매로 판매하고 있다. 냉동 어류는 민어·도미·오징어·대구·참조기·청어 등이며, 흔히 ‘큰 고기’라고 부르는 제수용 고기이다.

대풍 골목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가가 형성된 곳이 아니었다. 대풍 수산물 주식회사에서 건물의 일부를 뜯고 상가를 지어 임대했지만 상가는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대풍’이란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상가에는 우동집·식육점·인삼집·횟집[예전의 대구 횟집]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대구 횟집·충무 횟집·용마 횟집이 ‘판때기 홍콩바’ 반대편에 모여 있었는데, 시에서 철거를 명령하면서 도로 중앙에 좌판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대풍 골목에도 중앙에 좌판이 형성되었고 패류, 냉동 고기 가게도 당시에 함께 왔다. 3~4년 후에 중앙 좌판이 리어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아지고 불편해지면서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가고, 일부는 상가 앞쪽으로 옮겼다.

대풍 골목이 횟집으로 바뀐 것은 20년 전부터이다. 현재 대풍 골목에는 횟집 16개소, 냉동 어류[제수 고기]를 파는 집 12개소, 패류를 파는 집 12~13개소가 있다. 횟집은 처음에는 ‘다라이(tarai)’[대야]에 물을 담아 고기를 넣어 두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수족관이 보급되었다. 회는 썰어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놓고 그 위에 회를 썰어두었다가 판매하거나 바로 썰어 판매한다.

1973년 부림 시장 화재로 건물 전체가 소실된 후 난전을 하던 노점상 대다수가 어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어시장 내 난전은 엄청나게 늘었고, 진동 골목·대풍 골목·청과 시장 앞에서 대풍 골목까지, 진동 골목 샛길에서 너른 마당까지[충무 야채 골목 등] 도로 중앙에 좌판을 놓게 된다. 200~300명 가까운 상인이 제비뽑기를 통해 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이때 개인당 어상자 3개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고정 공간이 되었고 이후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소방 도로 확보를 위해 현재 농협에서부터 구 어업 조합 사이 150~200m 사이에 위치하던 난전을 시에서 강제 철거하고 그 자리에 만든 가게를 ‘판때기 홍콩바’라고 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불빛이 홍콩을 연상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치는 현재의 대풍 골목 좌측부터 대우 백화점 도로 끝까지였는데, 1번에서 64번까지 가게가 있었고, 30번 위치에는 ‘홍콩바’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규모는 13㎡ 정도로 도로와 바다에 말뚝을 박아 만든 가게였다. 탁자는 3개 정도 놓을 수 있었다. 갯장어[곰장어]·꼴뚜기·병어·준치·문어·해삼·멍게를 썰어서 아이스박스에 넣어 두었다가 판매했다. 구항 매립으로 홍콩바 골목은 사라졌다.

[구항 매립과 양분된 어시장 공간]

1992년 매립과 더불어 수협 공판장이 이전하고, 대우 백화점 건축으로 어시장 공간의 중심축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수협 공판장이 이전하게 되면서 해안로를 중심으로 어시장이 양분되었다. 어류·패류·멸치의 위탁이 이루어지는 수협 공판장, 기선 권현망, 남성 공판소, 잠수기 수협의 이전은 부속 상회의 이전을 동반하게 되었다. 수협 공판장의 이전으로 그 인근에서 도소매를 하던 상인들이 ‘수산물 도매 센터’를 만들어 집단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수산물 도매 센터’ 인근에는 수입산을 주로 취급하는 냉동 어류 상회가 밀집되었다. 1992년에 냉동 어류 상회 10여 집이 이전했고, 5~6년 사이 급증했다고 한다. 선어류를 취급하는 남성 공판소의 이전은 중매인 가게 전체를 공판장 부근으로 이전하게 했으며, 또한 타 지역의 선어류를 취급하는 가게들도 이전하게 된다. 이곳에 소매가 이루어지는 때는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다. 그 외는 유동 인구가 없기 때문에 거의 소매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제1·2구 잠수기 수협은 매립 후 신포동 62-4번지로 이전하였지만 유동 인구가 거의 없어 소매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권 형성을 위해 다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잠수기 수협 소속의 중매인 가게는 잠수기 조합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다.

해안로를 중심으로 어시장이 양분되면서 신어시장[신판장]은 도매 중심 시장으로, 구어시장[구판장]은 소매 중심 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또한 양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과거 건어물상과 공판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어시장의 중심축이 회 골목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활어 시장은 활어를 판매하는 횟집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형성된 회 골목이 중심이었는데, 현재 어시장의 중심이라면 이 활어 시장을 들 수 있겠다. 대풍 골목에도 활어를 판매하지만, 회 골목은 24시간 영업, 집중적인 자본 투자, 대우 백화점을 찾는 소비자와의 공간적 연계, 소비 패턴의 변화 등으로 인해 어시장 내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 어시장 내 회 골목 활어 시장의 번성과 달리 건어물상이 밀집되어 있던 곳과 충무 야채 골목과 같이 어시장 안쪽에 위치한 가게들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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