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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31
한자 -音樂-鄕愁-鎭海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숙

[정의]

벚꽃과 음악의 만남 감동의 꽃망울 터지는 진해.

[개설]

4월이 시작되면 우리나라 남쪽 지방 진해는 도심지뿐만 아니라 온 산과 언덕이 모두 꽃동산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어느 수필가는 4월을 ‘인생은 빈 술잔/ 융단 깔지 않는 층계/ 4월은 미친 듯이 꽃 뿌리며 온다.’고 표현하였다. 4월이 되면 항상 이 글이 머릿속을 맴돈다. 화려한 벚꽃 축제로 대한민국의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진해! 음악과 감동의 꽃망울이 터지는 진해에 대해 소개한다.

[진해의 벚꽃은 우리나라 꽃]

벚꽃은 화려하게 피었다가 어느 순간 꽃비처럼 흩날리며 사라져간다. 꽃비가 되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벚꽃처럼 우리의 젊음도 사라져가는 삶을 해마다 느끼며 아쉬워한다. 벚꽃은 가장 화려할 때 우리 곁에 있다가 잠깐 뒤돌아보는 사이에 덧없는 아름다움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순간의 아름다움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하여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진해 군항제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도 유명하지만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벌써 51회째 진해 군항제가 열렸으며, CNN 선정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 중에 창원시 진해구 여좌천·경화역 등이 들어있다. 또한 2013 경상남도 우수 축제로 선정되어 내실 있고 짜임새 있는 행사 기획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다양한 문화 예술 행사도 마련하여 지역민 참여형 명품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벚꽃 축제로도 불리는 진해 군항제는 1952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북원 로터리에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를 거행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63년 진해 군항제로 이름을 바꾸면서 충무공의 숭고한 얼을 추모한다는 본래의 취지와 향토 문화 예술을 진흥한다는 목적이 덧붙여져 각종 문화예술 행사, 세계 군악 페스티벌, 팔도 풍물 시장 같은 것이 추가되어 다채로운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

벚꽃이 진해의 명물로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진해를 군항으로 만들면서 도시 미화용으로 심으면서부터이다. 1905년 일본 연합 함대가 진해를 기지로 삼고 각종 군사 시설을 세웠는데, 1916년 본 해군의 진해 요항부가 설치되면서 군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복 후 시민들은 벚나무가 일본의 국화라 하여 베기 시작했는데 벚나무가 모두 없어질 무렵인 1960년 식물학자들이 진해의 왕벚나무 원산지가 일본이 아닌 제주도임을 밝혀냈다. 이때부터 시민들이 벚꽃 진해를 되살리는 운동을 펼쳐 벚꽃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제는 군항제 기간 동안 200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방문하여 벚꽃을 감상하면서 진해 관광을 즐기고 있다.

진해 군항제 기간 동안 여좌천 근처에서 작은 꽃잎 음악회가 열리는데, 진해 여중 관현악단이 두 차례 공연을 펼쳐 연분홍 벚꽃으로 둘러싸인 로망스 다리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진해 시가지 전체가 벚꽃 동산이지만, 특히 장복산 공원, 안민 고개 진해 쪽, 제황산의 365계단 주위, 여좌천 주변 1.5㎞, 경화역 일대 등에서 벚꽃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삼포로 가는 길」 창작의 고향, 삼포 마을]

벚꽃과 함께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진해 해안가를 따라가다 보면 관광객을 이끄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도시에서의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지막한 언덕에서 울려 퍼지는 낯익은 음악 소리, 그 익숙한 멜로디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굽이굽이 산길 걷다보면/ 한 발 두 발 한숨만 나오네

아아 뜬 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저 산마루 쉬어가는 길손아/ 내 사연 전해 듣겠소

정든 고향 떠난 지 오래고/ 내님은 소식도 몰라요

아아 뜬 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진해 웅천의 명동에 딸린 삼포 마을을 배경으로 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가사이다. 이 곡을 쓴 이혜민은 수필 『내 마음의 고향 삼포』에서 삼포 마을을 “어릴 적 강한 동경의 향수 때문인지 내가 우연히 여행길에 찾은 어촌 마을 삼포는 나에게 동경과 그리움을 충족하기에 충분한 마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혜민은 1970년대 후반 어느 해 8월 이곳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산길을 걷다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드넓은 바다를 향하여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 동화책에서나 봄직한 정겨운 풍경을 보고 이 아름다운 노랫말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 1983년 가수 강은철에 의해 대학가에서 널리 불리기 시작하다가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곳은 확 트인 바다와 푸른 뒷동산, 높은 창공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한적한 어촌 마을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낭만, 그리움을 느끼게 해준다. 해질 무렵 이 곳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옛 시절의 낭만과 여유로움이 느껴져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이 곡을 쓴 이혜민은 「아빠와 크레파스」·「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등과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즐겨 만들었다. 2008년 1월 진해시 웅천동[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삼포 마을 입구 도로변에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를 제막하였다. 삼포 마을에 가면 노래비에서 울려 나오는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이 느껴지는 멋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영길만의 「황포돛대」를 찾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에서 웅동 2동을 잇는 아름다운 바닷길 ‘진해 해안 도로’는 도로 양쪽으로 다양한 조경수와 아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해안 도로를 따라 자전거 도로도 함께 이어져 있어 아름다운 바닷길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하이킹을 가도 좋을 만하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더욱 낭만적인 곳이다. 해안 도로를 따라 아기자기하게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벚꽃 물결과 함께 파도가 넘실대는 진해 앞바다 영길만에는 「황포 돛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해안 관광 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시원스레 서 있는 노래비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노래비 전면에는 노래 가사가, 뒷면에는 작품 설명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에 작품 설명을 읽으며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작품 설명을 읽고 노래를 들으면 진해 앞바다의 그림 같은 풍경이 가슴에 새겨진다.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해지는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석양이 물든 바닷바람에 밀려 떠나가는 배,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석양을 보며 살아가는 인생처럼 쓸쓸함과 허무함이 함께 밀려옴을 잠시 느끼게 해준다. 해풍과 비바람이 만들어내는 구슬픈 파도 소리, 고향도 모르는 사공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떠나는 뱃길, 가사의 몇 소절만 듣고도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석양빛을 깃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배는 어디로 가느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파도 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 돛대야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이 어디냐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갈매기야 울지 마라 이 마음도 서럽다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 돛대야

노랫말을 지은 이일윤은 진해 대장동[성흥사 동네] 출신으로 지난 2000년 고인이 되었다. 작사자가 경기도 연천의 포부대 근무 당시 고향 생각에 긴 겨울밤을 지새우던 중 고향 영길만을 생각하며 지은 가사를 후배 백영호가 작곡하고 이미자가 노래로 발표하여 널리 애창곡으로 불리게 된 곡이다.

진해 해안 도로의 정점의 위치에 있는 흰돌메 공원에는 항구와 선박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화장실도 갖추어져 있다. 알차게 가꾸어진 공원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진해 신항만 공사장으로 예전의 그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은 되돌릴 수 없지만 진해 해안 도로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예전의 그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다.

「황포 돛대」가 울려 퍼지는 노래비 앞에서 작가가 그리던 고향의 모습을 찾으며 먼 추억 속으로 여행을 해볼 수 있는 곳이다.

아침에 해가 떠서 낮을 밝혀주고 석양으로 지는 일이 반복되고 모르는 사이에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영길만 바다 주변은 매립 공사로 날마다 조금씩 그 모습은 변해가고, 황포 돛대의 사공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체 우리의 인생도 하루하루 흘러간다. 진해 해안 도로를 따라 「황포 돛대」를 들으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주변 웅동 지역의 웅천 왜성, 안골 왜성, 수치 해안까지 볼거리 가득한 여행길이 펼쳐져 있으니 알찬 여행 코스가 될 수 있겠다.

해질 무렵 영길만 황포 돛대를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금수현이 못다 이룬 안골 음악촌]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우리나라 가곡 「그네」의 노랫말이다. 금수현[1919~1992]이 작곡하고, 그의 장모인 김말봉이 작사하였다. 금수현은 세계적인 지휘자이며 현재에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금난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그는 서울을 떠나 마지막 여생을 고향 바닷가에서 후진들을 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후 극심한 피로의 누적으로 당뇨 합병증이 되어 오랜 투병 생활을 하였다. 1992년 2월 그의 투병 생활 도중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 사덕 마을 생가 앞 제방에서 금수현의 노래 「그네」가 제막되었고, 그해 7월에는 국민들의 애창곡으로 불리던 「그네」가 체신부에서 기념우표로 발행되기도 하였다. 1992년 8월 31일 저녁 지병으로 부인 전혜금과 3남 1녀, 여덟 명의 손자와 손녀를 남기고 73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문화부에서 옥관 문화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가곡 「그네」·「안골포」를 작곡한 금수현이 생전에 만년의 꿈으로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115-1번지 바다[지금의 진해 신항만]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음악촌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 금수현은 세계적인 음악 축제가 주로 작은 소규모의 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하여 젊은 시절부터 뜻을 함께하는 음악인들과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음악제를 열 수 있는 마땅한 바닷가 땅을 찾다가 이곳을 그 장소로 결정하였다. 1979년 5월 안골만과 가덕도가 내려다보이는 동망산 언덕 땅 19,800㎡을 구입하고 작곡가 협회 회원들과 함께 17㎡짜리 연립 숙소를 짓고, 이어서 ‘안골 음악촌’을 건립하여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서 1990년 7월부터 1992년 8월까지 거주하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하지 못하고 방학 동안 제자들이 찾아와 숙식을 하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촌 도로가 개설되고 음악당을 건립하여 매년 여름철에 본격적인 음악제를 개최하려고 할 즈음 안타깝게도 1992년 8월 31일 세상을 떠나 미완성의 음악촌으로 남고 말았다. 현재 그의 꿈을 간직한 낡은 건물 한 채와 ‘금수현’이라는 명패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어 찾는 이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고 있다. 금수현이 생전에 동망산 언덕에서 가덕도를 바라보면서 안골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곡 「안골포」만이 전해져 온다.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니/ 바다가 호수인가 호수가 바다인가

갈매기 날아가네 울면서 날아가네/ 고깃배 거북선인 듯 그 옛날이 아롱지다

안골포 성위에서 수평선 바라보니/ 바다가 하늘인가 하늘이 바다인가

구름이 흘러가네 바람을 헤어가네/ 옛님도 가슴 조인 듯 그 함성 들려온다

이 곡은 금수현 작사·작곡으로 1993년 10월 KBS FM 신작 가곡 1집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안골 음악촌에서 내려다보면 호수 같은 바다가 보이고 건너의 가덕도가 바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신항만 공사로 어수선하며 호수 같았던 바다는 조금씩 줄어들어 예전의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또한 아름다운 안골포 작은 마을에서 음악촌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 뜻을 함께하는 음악인들과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음악제를 열고자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도 서려 있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던 고개, 안민 고개]

안민 고개[安民嶺]는 진해 지역에서 창원시 안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는 임진왜란 때 황(黃) 장군이란 명장이 있어서 왜군이 고개를 넘지 못하게 방어를 잘하여 그 쪽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장복산(長福山)[582.2m]의 산허리에 있는 길이 약 9㎞의 고갯길로, 창원시 진해구 태백동성산구 안민동을 이어준다. 전망대는 물론 고갯길 군데군데에서 진해만(灣)진해시가 내려다보이고, 웅산·시루봉·천자봉 등의 산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경치가 뛰어나다. 특히 일출·일몰 풍경과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장복산과 시루봉의 등산 기점이 된다.

진해 쪽 약 5.6㎞ 구간 왕복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 되면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이루며, 도로를 따라 나무 바닥[데크] 산책로가 조성되었고 산책로 곳곳에 벤치와 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창원에서 진해로 가려면 안민 터널로 가는 방법과 안민동을 거쳐 안민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안민 고개를 넘어가서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봄이면 벚꽃 터널을 만들어주고 여름에는 넉넉한 푸른 숲을 안겨 주는 숲속 길이 조성되어 있다. 안민 고개에서는 진해의 앞바다와 진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도 볼 수 있고 지루하면 뒤에 펼쳐진 산도 벗할 수 있는 곳이다. 요즘은 자동차로 쉽게 이동이 가능하나 예전에는 이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정을 나누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안민 고개 서쪽 산둥에는 ‘회치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으니 여기는 살림을 사는 아낙네들의 단순한 놀이터가 아닌 뜻을 지닌 산이 있다.

‘회치산(會峙山)’이란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달리던 마을의 부녀자들이 1년에 한두 번 산마루나 버덩에 모여 놀이를 하던 곳을 말한다. 회치산에 모여 놀던 부녀자들은 이날 하루만은 시집살이에서 해방되는 날이 되었다.

봉건적인 인습에서 사는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하면서 친정을 갈 수도 없이 매여 사는 처지였다.

창원 지방과 웅천 지방[현 창원시 진해구]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시집을 가는 경우도 많았고 시집을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한 번 시집을 가면 산 하나를 둔 가까운 거리라도 친정을 갈 수도 없고 친정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양쪽에서 올라올 수 있는 산마루에 자리를 정하여 같은 날에 ‘회치’를 하자고 약속을 하여 출가한 딸 등이 그곳에서 친정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말하자면 만남의 고개였다.

그 때는 추석이 지난 음력 17일에 창원 지방이나 웅천 지방에서 출가한 딸들이 이곳에 올라와서 1년에 한 번이라도 친정 가족들을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었던 곳이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매운 시집살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얽혀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맺음말]

4월이면 진해는 온 도시 전체가 벚꽃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세계적인 축제의 도시가 된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어릴 적 고향의 향수를 담고 있는 노랫소리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해안가 어촌 마을을 볼 수 있다. 꽃비와 사라지는 젊음의 아쉬운 뒤안길에서 황포 돛대가 울려 퍼지는 한적한 해안 도로를 만날 수 있으며 열정적인 음악가의 못다 이룬 꿈이 서려 있는 안골포가 있는 진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던 굽이굽이 벚꽃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있는 곳, 진해는 아름답고도 감동의 꽃망울이 톡톡 터지는 그런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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