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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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裨補-谷安-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정헌 |
숲 | 장산 숲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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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 성주 이씨 재실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곡리 |
[마을의 형성]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谷安) 마을은 유서 깊은 동네이다. 동네 어른들은 실안[신안]이라고 부르는데, 실이나 골은 골짜기를 뜻하는 말이니 골짝 안쪽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지명인 곡안으로 바뀌었다. 성주 이씨와 광산 김씨 집성촌으로 한때는 120여 가구가 터를 잡고 살았지만 현재는 광산 김씨 10여 가구, 성주 이씨 30여 가구와 황씨·조씨·우씨·정씨 등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곡안 마을 역시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노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부는 인근의 도시로 이주해 촌락이 예전 같지는 않다. 곡안 마을은 1650년경 광산 김씨와 성주 이씨가 처음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촌로들은 현재도 이 두 성씨 간은 남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끈끈한 유대감으로 맺어져 있다. 혹자는 이 두 성씨가 터를 잡고 살기 전에 영일 정씨 몇 가구가 이미 살고 있었다고도 한다.
[비보(裨補) 장산 숲]
곡안 마을 초입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을 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숲이 조성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양촌 맞은편의 적산[적석산]에서 동네를 바로보지 못하게 하고자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숲은 비보(裨補)의 의미를 지니고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거수가 우거진 숲의 위용으로 한때 유원지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에 해제되면서 산뜻한 쉼터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곡안 마을 숲은 마을 주민과 국도 2호선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2011년 4월부터 창원시 공원 사업소에서 총면적 3,540㎡에 산책로와 주민 모임 광장, 체육 시설물, 등의자, 평상 등 편의 시설물과 주차장, 음수대 등을 교체하고 철쭉 등의 꽃나무도 식재하여 현대식 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장산 숲은 예전에는 ‘동네 숲’이라고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는 마을에서 숲을 조성하고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 때 면사무소에서 숲에 대한 토지세를 부과하자 이를 귀찮고 못마땅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소유권을 진전면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창원시에서 관할하고 있다.
이 숲 입구에는 육중한 성주 이공 기석 순형 의적비(星州李公基碩殉兄義跡碑)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옆에는 크지 않은 자연석에 ‘공회대(孔懷臺)’라 적힌 빗돌을 볼 수 있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광산 김씨의 세거지 비석과 애국지사 후손인 금강 김규현 공 기적비(金剛金奎鉉公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세거지 비석은 2012년 38세손인 모(某) 기업을 운영하는 후손이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또 숲에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는 정자까지 갖추고 있다.
또 마을의 경로당[마을 회관] 오른쪽에는 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 개울을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조성하여 놓았는데, 신선들이 노니는 의미라는 선유교(仙遊橋)로 1980년에 만든 것이다. 개울은 마을 안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마을 뒤편에 1956년에 조성한 ‘곡안 저수지’ 덕분에 비가 오지 않아도 사계절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 개울을 따라 너럭바위들이 즐비한데 일급수에만 산다는 다슬기와 크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물고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숲은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 전까지는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풍물패들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이곳에서 봄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동네 회치’를 하고 있으며, 1970~1980년대까지는 해마다 이곳에서 마을 노래자랑이 열리기도 하였다. 현재 정월 대보름 행사는 진전면 청년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현대사 비극의 현장 성주 이씨 재실]
장산 숲에서 고추를 손질하던 이휘순 할머니는 곡안 마을의 비극적 현장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李)할머니는 이웃한 진북면의 배못에서 18세에 이 마을로 시집을 왔는데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할머니가 시집을 올 때 친정이 그런대로 잘 살아서 장롱까지 혼수를 마련해 트럭으로 싣고 올 정도였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고 남편을 전장으로 보낸 후 여태 소식이 없어 홀몸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슬하에 딸 둘을 두어 현재는 두 딸과 함께 곡안에서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피란 생활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와 보니 마을 길가 여기저기에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였다는 말로 당시의 비극을 전하기도 한다.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천만다행으로 샘이나 우물에 몸을 숨겼던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초순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과 경계 지점인 함안군 군북면에서 마산과 부산 쪽으로 진격하기 위해 이 지역에 매일 격렬한 포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미군 제25사단은 미 해병대와 한국 경찰로 특수 기동 부대를 구성하여 이 지역 마산 고등학교에 주둔하며 이에 맞서고 있었고, 곡안리에 북한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인접한 마을인 봉곡 마을의 성주 이씨 재실에 모여 불안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1950년 8월 11일 오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존자 이만순은 8월 초부터 성주 이씨 재실 뒷산에 북한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 전투가 있을 테니 어서 피란하라는 소개령을 미군과 동행한 통역관이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학살 사건 당일 재실 앞 솔밭에서 정찰하던 미군 몇 명이 북한군이 쏜 것으로 추정되는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곧 이어 소총 사격과 전투기의 기총 소사가 재실에 퍼부어졌다. 황점순은 “재실 안에 총탄이 쏟아지면서 수많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쓰러졌으며 나도 시어머니와 두 살 난 아들을 잃고 전신에 총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이만순도 “이날 총격으로 74명[희생자가 83명이라고도 함]이 재실에서 즉사하고 부상을 입은 9명은 2~3일 후에 숨졌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참상은 당시 미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난 전쟁 비사에 묻혀 버렸고, 주민들도 그날의 참상의 기억을 되새기기 싫어 주민 차원에서의 추모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이 당시의 참상에 대해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군이 무고한 양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무엇 때문에 미군이 총격을 가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 증인은 사건 당일 재실 앞 솔밭에서 미군 수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곧 이어 미군의 총격이 시작됐다고 말해 미군의 보복성 사격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증인은 “미군이 숨졌다는 얘기를 들은 다음 날 대대적인 총격이 있었다.”면서 “당시 격전 지역이었던 이곳에서 전투기까지 동원한 북한군 소탕 작전 중 무고한 양민이 희생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미군의 발포 이유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무고한 수많은 양민이 숨진 것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봉곡 마을 성주 이씨 재실의 우물에는 이 날의 비극을 증언이라도 하듯 수십 곳에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마산 보도 연맹 학살 사건과 곡안 사람들]
현대사에서 곡안 마을의 비극은 흔히 마산 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마을 주민들에게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이 사건은 1950년 7월 15일 일제히 소집령이 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남편 이용순[당시 25세]을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은 황점순은 “음력 6월 초하루[양력 7월 15일]였지. 점심때가 좀 지났는데 지서 앞으로 보도 연맹원들을 불렀어. 남편은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지. 소문으로는 마산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다시 바다로 끌려 나가 수장 당했다고 해.”라고 증언한다. 그 후 할머니는 마산 형무소까지 함께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사람이 전해준 날짜[음력 7월10일]에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어. 빨갱이 심부름도 안 했고 삐라도 안 돌렸는데 억지로 가입하라고 해서 순진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가 그런 일을 당한 거야.”
곡안리에는 당시 보도 연맹원으로 형무소까지 끌려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영상은 1950년 7월 보도 연맹원으로 소집돼 동네 사람 15~17명과 함께 마산 형무소까지 끌려갔으나, 부인 변정이와 가족·친지의 온갖 노력으로 학살을 면했다. 김영상은 그해 7월 15일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가입 경위에 대해 “몇 달 전 학교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죄가 있거나 지서에 잡혀간 적이 있는 사람은 손들라고 했을 때 순진하게 손을 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모든 죄를 삭감해 줄 테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땐 그냥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형이 아우에게 가입을 권유한 경우도 있었다. 해방 후 건국 운동을 하면서 삐라 한번 붙여보지 않은 청년이 없었던 터라 동네 청년들은 모두 가입 대상이 됐다.”고 증언한다.
이귀순 할머니도 남편 황치원[당시 22세]을 보도 연맹 사건으로 잃었다. 1950년 7월 15일 동네 사람 15명과 함께 훈련 받으러 간다고 집을 나선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갈 때 그랬어. ‘들녘에 메어 놓은 소도 데리러 와야 하니 어서 갔다 올게.’하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까지 안 돌아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어. 군대도 안 가고 좋다고 해서 가입했는데 왜 죽였는지 몰라.” 결혼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마산 앞바다에서 수장을 당했다고 했다.
그 후 할머니는 지금까지 딸 둘을 키우며 혼자 농사를 일구고 살아왔다. “나중에 들으니 빨갱이여서 죽였다고 하데? 빨갱이 아니었어.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농사꾼이 빨갱이가 뭔지나 알았겠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였는지나 속 시원히 알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난리통에 불에 다 타버렸어.” 이들 할머니의 남편이 수장된 괭이 바다와 가까운 해안에는 당시 수많은 익사체가 부패한 상태로 떠올랐는데 모두 손이 꽁꽁 묶인 채였다고 한다. 그때 살이 올라 큰 대구가 특히 많이 잡혔는데 모두들 이를 ‘사람 고기’라 불렀다고 한다.
[위의 이만순·황점순·김영상·이귀순 등의 증언은 1999년 『연합 뉴스』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임]
[곡안 마을의 세시 풍습]
곡안 마을 뒤편에는 마을의 주산인 인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에서 여러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 산에는 말발굽 발자국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말바우[마을 사람들은 흔히 신선 바우라고 부른다]가 있는데, 그 발자국은 공룡 발자국 화석으로 밝혀졌다. 또 마을의 서북쪽에는 소의 길마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된 질마재가 있으며, 주점이 있었던 곳을 사랑터라 하기도 한다. 또 지형이 부뚜막처럼 생겨서 불린 부뚝골이 자리 잡고 있다.
다음은 곡안 마을의 예전 세시 풍습을 정리한 것이다.
우선 봄철의 회치[히치] 풍습이다. 마을에서는 봄철에 해마다 부녀자들만 회치를 하는데, 장소는 주로 마을 뒤편의 ‘당산 먼댕이’였다. 이곳은 현재 곡안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1956년에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저수지가 있어 놀기에 그만이었다고 한다. 또 주변에는 큰 너럭바위가 많아 이곳에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였다. 하루 종일 풍물을 치면서 놀았는데, 현재는 마을 이장이 날을 잡아 장산 숲에서 남녀노소 모여 놀며, 밴드를 불러 흥을 돋우기도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장월달의 세시풍습으로 장 담그기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에 주로 장을 담그는데 장을 담는 날짜가 중요하다고 한다. 주로 손 없는 날을 선택하는데, 절대 닭날에는 장을 담가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닭이 발로 거름이나 땅을 파 뒤집고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독에는 깨, 고추 3개, 참숯 등을 넣는데 모두 장맛을 나게 한다고 믿는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명태나 대구 등도 넣었다고 한다.
곡안 마을에서는 예전에 부녀자들이 아기를 낳지 못하면 치성을 드리는 장소도 있다. 마을 뒤편의 실안골못[저수지] 회화나무가 있는 곳에서 부녀자들이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비손하였다. 회화나무는 지금도 저수지 오른쪽에 건재하게 서 있는데 그리 크지 않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있다. 회화나무 밑에는 3.3~6.6㎡ 정도의 평지를 조성하여 예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나무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비손 시간은 주로 사람의 흔적이 없는 새벽이나 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공을 들였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풍습은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오곡밥을 지어 먹었다. 쌀·보리·팥·조·수수로 짓는데 아주까리 잎으로 싸서 먹었다. 그래야 산에 가서 꿩알을 많이 줍는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월 대보름 풍습은 6·25 전쟁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6·25 전쟁의 상흔을 몸소 체득한 마을 주민들의 아픔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정월에 부녀자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금기시 여기는 풍습도 있었다. 특히 초하루 외출은 철저히 금기시 되었다. 부녀자가 출입을 하면 재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월의 할만네 풍습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할만네’에게 비손한다. 새벽에 마을 중앙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성주에 놓고 비손하는데 오색의 헝겊을 대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비손 내용은 주로 “성주 조왕님네 우리 집안 화목하게 해 주시고…….” 라고 한다.
곡안 마을에는 기우제 풍습도 있었다. 제주(祭主)는 면장이나 동장이 맡으며, 상주나 액운을 본 사람은 절대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였다. 여자는 갈 수 없으며 남자들만 산에 가서 제를 지내는데, 이때 각 가정에서는 병에 물을 넣어 솔잎을 꽂아 거꾸로 매달아 두고 연기를 피운다고 한다. 그러면 마치 하늘에서 솔잎을 따라 물방울이 흘러내리면 형상을 해 비가 온 다는 것이다. 이런 기우제 풍습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신선 바위에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