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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43
한자 月下金達鎭詩人-生涯-詩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 2월 4일 - 김달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달진 계광 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0~1923년 - 김달진 서울 중앙 고보 입학|중퇴
활동 시기/일시 1923~1926년 - 김달진 서울 경신중학 입학|퇴학
활동 시기/일시 1926~1933년 - 김달진 진해 계광 보통학교 교사 부임|퇴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김달진 『문예공론』 등단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김달진 금강산 유점사에서 김운악 스님을 은사로 하여 득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김달진 중앙 불교 전문학교[현 동국 대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김달진 『시인부락』 동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김달진 「샘물」 등 작품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김달진 중앙 불교전문 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김달진 시집 『청시』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김달진 『동아 일보』 기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김달진 청년 문학가 협회 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김달진 『죽순』 동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김달진 진해 중학교 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김달진 『자유 민보』 논설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김달진 동양 불교 문화 연구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4~1988년 - 김달진 동국 대학교 동국역경원 심사위원 활동 시작|종료
활동 시기/일시 1983년 - 김달진 불교 정신 문화원에서 한국 고승 석덕(碩德)으로 추대됨
몰년 시기/일시 1989년 6월 7일 - 김달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김달진 은관 문화 훈장 추서
출생지 김달진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로59번길13[소사동 43]지도보기
거주지 거주지 이동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금강산 유점사|함양 백운산 화과원|북간도 용정|서울|대구|창원|서울
별세지 별세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로5길 90[일원동 643]
묘소 김달진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산 157 풍산 공원 묘원
성별
아호 월하(月下)

[창원에서 나서 창원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인이 되다]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시인은 아버지 김규석(金圭奭), 어머니 조용락(趙鏞樂) 사이에서 1907년 2월 4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동[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야은(野隱)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인 계광 보통학교에 들어가 13세인 1920년에 졸업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앓게 되어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을 한다.

1923년 서울로 되올라가 경신 중학교를 다녔지만 4학년 때 일본인 영어 교사 추방 운동을 주동한 까닭에 퇴학당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6년부터 계광 보통학교가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1933년 폐교될 때까지인 7년 동안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일본에서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한 형 김동진(金東鎭)으로부터 동경으로 유학 오라는 성화가 빗발쳤지만 뜻을 두지 않았고, 일본의 문학 전집과 세계 대사상 전집 등을 두루 읽었다.

계광 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김달진은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 공론』지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시 「잡영수곡(雜咏數曲)」이 실리면서 우리나라 문단에 나온다.

이후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 지면에 시를 발표하던 즈음의 일이다. 진해 청년회를 조직해 청년 운동을 시작으로 동아 일보 진해 지국, 진해 농민 동맹, 신간회 창원 지회장으로 항일 독립에 앞장섰던 주병화(朱炳和)가 일본 군의관에 의해 41세를 일기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1931년 1월 14일 김달진은 「떠나간 이를 생각하며 주씨의 부고를 듣고」라는 조시를 그의 영전에 바친다. 김달진의 나이 스물여덟 살에 쓴 조시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그는 참말 갔는가

갔으면 왜 갔을까

어찌하자고 갔을까

이 일과 이 동무들을 다 버려두고

그는 영영히 그만 떠났네

눈이나 감았을까

이제 우리들 모임에도 한 자리 비겠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었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없어서는 안 될 한 사람이었네

그는 별로히 말이 없었네

그러나 대지와 같은 침묵이었네

그대 굳센 성격은 병상에서도 물달라 않고

시간을 물었다네

그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네

흉금을 떨면 조금도 거짓이 없었네

앞으로 나갈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네

위 시 2행 ‘갔으면 왜 갔을까’라는 것은 1931년 1월 10일 급성 맹장염으로 진해 해군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이 잘 되었으나, ‘민족 운동을 하는 조병화’라는 군의관의 말과 함께 의문사하게 된 것을 일컬음이다. ‘이제 우리들 모임에도 한 자리 비겠네’라는 진술을 통해 김달진 역시 주병화 선생과 더불어 당시 신간회 창원 지회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홀한 입산 유점사 가는 길, 그리고 아내의 죽음]

김달진은 계광 보통학교가 폐교되고 민족 현실의 절망과 좌절의 끝자락에서 어느 날 밤 찢어진 벽지 사이 애벌 신문지에 뚜렷이 보이는 ‘불(佛)’자를 발견한다. 빛으로 여는 세상이 그의 마음에 섬광처럼 빛났다. “1933년 늦가을 선친의 심부름을 가서 받은 소작료를 여비로 삼아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고향을 떠난다. 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올라가다 눈을 만나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 금강산 유점사에 도착하여 부처님오신날인 4월 초파일 김운악(金雲岳) 주지 스님을 은사로 하여”[김달진, 「나의 인생, 나의 불교」] 승려가 된다.

1935년 봄 승려 백용성을 모시고 함양 백운산의 화과원(華果院)에 들어간 김달진은 반선 반농의 수도 생활을 하면서 백용성이 번역한 화엄경의 글을 다듬는 데 온 마음을 다한다. 그는 ‘아무리 참선을 하여도 마음에 평정을 찾을 길 없어 고향에 들렀다가’[김달진, 「나의 인생, 나의 불교」] 뜻밖에도 다음날 아내의 임종을 맞는다.

고달픈 걸음 몇 걸음 걷고 서도

휘파람 멋쩍어 안 불리네

세모래밭에 쏟은 물발처럼

슬픔에 폭 먹히지 않는 내 마음의 슬픔

찬 바람 검은 주의(周衣)자락을 날리는데

나는 그의 생일날을 외우지 못하고나 !

[시 「낙월」 부분]

[학승과 시인의 길-동국 대학교와 시인 부락]

화과원으로 돌아와서 유점사 공비생으로 중앙 불교 전문 학교[현 동국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6년이었다. 초창기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던 그는 이곳에서 서정주·김어수 등 친구를 만나게 되고, 같은 해 5월 당시 하나뿐인 순수 시전문지 『시원』의 동인으로 김동리와 교분을 갖게 된다. 아울러 11월 서정주·함형수와 더불어 동인지 『시인부락』지를 내며 시인으로서 뚜렷한 문단 활동을 하게 된다.

김달진 생애에서 가장 활발하게 시를 발표한 시기는 1935년이다. 『시원』 동인으로서 작품을 수록함은 물론 『동아 일보』를 발표 지면으로 하여 무려 30여 편을 발표하였다. 이후 1938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작품을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당시 대표작 중의 하나가 1938년 2월 23일 『동아 일보』에 게재된 「샘물」이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地球)의 섬 우에 앉았다.

이 시에 대해 시인이자 고려대 교수인 오탁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을 우연한 기회에 읽고 어째서 이렇게 우수한 시인이 문학사에서 거의 매몰되다시피 한 상태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며 우리 문학사의 얄팍한 질(質)에 분노를 느꼈다. 역시 한국의 문인들은 적당히 문단 정치도 하고 거드름도 피워야만 사적(史的)으로 생존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1938년 『동아 일보』에 게재됐던 것으로 그 당시의 우리 시단의 질적 수준이나 또 오늘날 우리가 현대시의 방법은 무엇이냐고 할 때 하나의 모범 답안이 될 만한 언어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제 암흑기 불법(佛法)과 문학-유점사, 그리고 재만 조선 시인집]

1939년 김달진은 중앙 불교 전문 학교를 졸업한다. 이즈음 그의 시는 모든 인간과 사물에 대한 호의와 선의에 찬 어조로 자연을 노래한다. 관념이나 이념을 앞세우는 그 자체가 깨끗하지 못하며 만물에 이름을 애써 매기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생각으로 명명 이전의 우주의식, 무심하게 흐르는 사물 본연의 그대로를 서정의 세계에 담아낸다. 묵묵함과 준엄함, 득도 득시의 길을 걸으며 1940년 9월 총 85편의 작품이 수록된 시집 『청시(靑柿)』를 낸다.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김달진, 「비시(扉詩)」]

시집 『청시』의 서시 성격을 지닌 이 시는 김달진 시인의 생가, 특히 6월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놓은 작품이다. 사립문 열고 들어서면 작은 뜰, 감나무의 가지와 잎새와 청시와 선들 바람. 이들의 꿈은 아직 푸르다. 밝고 깨끗함이 세상의 중심을 이루며 빛나는 세계. 만물은 조화로움을 이루며 낙락하게 살고 있는데, 인간은 오만과 거짓으로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자신을 내세운다는 것은 남을 내친다는 것. 밀어 내치는 순간 온갖 다툼이 앞을 가려 참다운 자신을 찾는 것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헛된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을 넘어서 자연이 머금고 있는 기쁨의 세계에 깃들어 보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리도 푸르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유점사로 돌아온 그는 불법(佛法)을 지휘 감독하는 법무(法務)가 되어 70여 사찰의 본사와 말사를 다니며 부처님의 뜻을 해설하고 토론하는 강론에 온 힘을 기울인다. 이때마다 일제 강점기 나라 형편이 온당하지 못함에 대한 발언을 계속해 요시찰 인물이 되고, 특별히 그를 감시하던 일제 경찰을 눈 속에 처박은 사건이 일어나 주변의 권유로 유점사를 탈출한다. 1941년 백용성이 북간도에 세운 대각교 농장에 잠시 머무르면서 소설가 안수길이 발간하고 있는 『싹』이라는 잡지에 시를 게재하기도 하는데, 이는 『재만 조선 시인집』에 수록된다. 백용성이 입적한 후 대각교 농장은 운영상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김달진은 1년간의 북간도 생활을 끝내고, 금강산 유점사로 돌아와 생활하던 중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다.

[문학의 정점에서 경건한 정열의 길로-교사 시인으로의 순수를 좇아서]

1945년 광복이 찾아왔다. 하산하자마자 그는 「아침」·「자유」·「그분들은 오셨다」를 벅찬 가슴으로 방송을 통해 노래한다. 조국 광복은 그에게 새로운 신의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할까가 문제인 것이다.”[김달진, 「삶을 위한 명상」]. 속세를 벗어난 승려로서의 삶, 혹은 환속하여 일상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이른바 ‘무엇을 할까?’라는 것에 앞서, 그는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이광수의 소개로 당시 『동아 일보』 주간이던 설의식을 알게 되어 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다.

한편 김구가 참석한 청년 문학가 협회 창립 모임[서울 YMCA, 1946. 4. 4.]에서 명예 회장에는 최명익, 부회장으로 유치환·김달진이 피선된다. 그러나 최명익이 평양에 머물러 있는 관계로 수정 작업을 추진하여 명예 회장에 박종화, 회장 김동리, 부회장 유치환, 김달진으로 확정되었다가 청년 문학가 협회 제2회 전국 대회[1947. 11. 5.]에서 회장 유치환, 부회장 서정주김달진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문학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때를 좇아 인심을 어지럽히는 세상에서 자신의 활기찬 순수를 보호하는 길’은 수도생활과 같은 교사 시인으로서의 길이었다. ‘해방 후의 정치적 와중에서 중 생활을 해 온 나에겐 신문 기자가 적소가 아니라고 판단’[김달진, 「나의 인생, 나의 불교」]한 당시의 정신적 정황을 서울대 김윤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체념한 다음의 ‘나’란 어떠한가. 장미꽃도 피도 깡그리 사라진 회색의 세계로 돌변하고 있지 않겠는가. 근대 교육에 노출된 젊은 월하의 관념으로서의 연모의 세계가 사라진 세계란 이처럼 무색무취의 단순화된 회색의 세계였던 것. 남은 것이라곤 ‘조그만 내 생명’에 대한 인식일 뿐. [중략] 이 장면이야말로 월하 시의 최고 경지이자 이 나라 근대시의 한 봉우리라고 생각한다. [중략] 월하는 이 경지를 ‘경건한 정열’이라 불렀다.”[김윤식, 「월하의 시 ‘경건한 정열’ 읽기」]

내 살은 대지,

내 피는 태양,

그리하여 내 생명은

희뿌엿이 밝아오는 창 앞에

먼 여명의 장밋빛 치맛자락,

구슬처럼 영롱한 바람이 옷깃을 스민다.

경건한 정열, 한 대 선향(線香)을 사르노니

가는 연기는 나직한 이마에 어리고,

내 혼의 응시하는 곳은 사념(思念)의 저쪽,

더운 입김에 얼어붙는 창명(蒼溟) 속으로

다른 숨길을 따라 명멸하는 뭇 별의 미소,

신(神)을 방석하고 앉아 가만히 이르노니

- 빛이 있어라

- 빛이 있어라

바른 힘은 샘처럼 솟고,

사랑은 꽃처럼 피는 동산에

이슬 방울마다 은잔을 받들었다.

내 살은 대지,

내 피는 태양,

그리하여 내 생명은 바다의 대기.

[김달진, 「경건한 정열」]

‘신을 방석하고 앉은 자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신은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정신 작용으로서 존재자의 시간적 진행을 관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빛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김달진의 독특한 시적 상상력이며, 자신의 피와 살이 대지와 태양이 된 까닭에 자연을 따르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최동호, 「만물 일여와 무위 자연의 시학」]이 된다.

욕망으로 인한 온갖 다툼을 버린 자리, 명예와 허욕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사는 것을 비운 자리에서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가 경북 여자 중학교에서 다시 교직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죽순』 동인으로 참여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한다. 1948년 고향 진해로 내려와 진해 중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고향에 정착한다.

김달진은 『자유 민보』의 논설위원과 해군 사관 학교 출강도 하던 중에, 남면 중학교[현 창원 남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직에 몸담다가 1962년 정년 퇴직한다.

[역경의 무명성을 초월한 진리의 길-한국 고승 석덕(碩德), 월하 김달진 선생]

창원 남중학교 교장 퇴임 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봉선사 주지이자 역경원장이었던 이운허를 법사로 모시고, 동국 대학교 동국 역경원의 심사위원이 되어 고려대장경 번역 사업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의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김달진의 당호이기도 한 월하(月下)는 이때 이운허가 지어준 것이다. 월하가 심혈을 기울인 역경 사업은 대략 20여 년간 집중적으로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월하는 대략 200자 원고지 15만 장 정도의 불경을 번역한 것으로 추산된다.

“왜 이름을 밝히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월하 선생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뜻이라고 답했다. 큰 진리가 있는데 소소하게 자기 이름이나 알리려고 한다면 애초에 역경 사업에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인데, 구태여 이름 따위가 무엇이냐는 것이 월하 선생의 지론이고, 또 그것을 실천한 것이 월하인 것이다.”[최동호, 「역경의 무명성과 시적 자기 발견-월하 김달진이 지향한 삶」]

더욱이 역경 작업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동양 고전과 불교 전적에 대한 방대한 번역 작업은 월하 선생에게 있어 경건한 정열 그 자체 구도의 길이었다.

구름에 가려졌다고 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달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무명의 중생들을 밝히는 달의 아래에 있고자 했던 월하가 나아가고자 했던 것은 필생의 깨달음 그 자체였다. 1983년 그는 불교 정신 문화원으로부터 ‘한국의 고승 석덕’으로 추대된다.

[도(道)에 이르는 시학-시로 이루는 노장과 화엄의 세계]

역경 작업에 몰두하면서 문단에서 잊혀졌던 김달진은 1967년 『신문학 60년 기념 100인 시선』에 작품 「임의 모습」을 게재하고, 1973년 『불교사상』지에 수상집 「산거일기」를 연재하였으며, 1974년 불전(佛傳)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를 내는 정도로 침묵하였다.

1979년 동인지 『죽순』 복간호가 발간되면서 김달진은 「벌레」·「속삭임」·「낙엽」·「포만」 등의 시를 발표한다.

김달진이 한국 문단에 ‘열치매 나타난 달’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3년 그의 시 전집 『올빼미의 노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이다. 시집 『올빼미의 노래』는 이전에 나온 『청시』와 1950년 봄에 저자가 시집 발간을 위해 편집해 둔 ‘올빼미의 노래’ 합본인데, 『죽순』지에 발표된 시를 보탰다. 대체적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쓴 작품이지만, 우리 시단에 이런 시인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반향은 컸다.

시집 『올빼미의 노래』를 출간한 이후 김달진은 역경 작업을 하면서도 만년에 다시 시를 쓰는데, 그 길은 이른바 ‘도에 이르는 시학’ 그 자체였다.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을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김달진, 「씬냉이 꽃」]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이라 놀이간다 야단들인데’ 이 시의 화자는 참으로 고즈넉하게 ‘혼자 뜰 앞을 거닐고’ 있다. 애써 찾아갈 곳도, 찾아 줄 이도 없는, 이를테면 세상의 번잡함을 한 켠으로 밀어둔 삶의 공간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그늘 밑에 조그만 씬냉이 꽃’을 본다. 떠들썩하거나 호사스럽게 살아갈 것 없는 삶의 그늘은 마치 시의 화자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과 같다. 씬냉이 꽃에 머금은 모습이 자기의 심정으로 와 닿아 인간의 본상(本相)으로 거듭나는 세계, 그늘지고 외진 곳에 피었더라도 하얀 ‘씬냉이 꽃’과 ‘흰 나비’가 낙락하게 어울려 사는 세계, 그늘지고 외진 세상살이를 두고 슬퍼하거나 외로워할 까닭도 없고, 화창한 삶이라고 해서 화들짝하게 여길 것도 없는 자리에 ‘만물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 성(性)이니, 성은 모든 생명의 본질’[『장자』 경상초편]로서 저리도 맑게 살고 있듯이 김달진 역시 자유자재로 살아간다.

이를 두고 고려대 최동호 교수는 월하 시인의 범아일여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고도 하였다. 마음을 놓아버리니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다다른 순연한 세계 속에 다음 시가 있다.

어제 밤

꽃 떨어지는

꿈꾸었으니, 이제

봄이 바야흐로 지나가려 한다.

강물은 봄을 따라

말없이 흘러가고

하늘의 달마저 창연히

서쪽으로 기운다.

갈 길은 아득한데

이 지는 달빛을

밟으며 몇 사람이나

집으로 돌아갈까

나는 그저

멀리 강 언덕에 늘어선

나무들만

무연히 바라본다.

[김달진, 「당시(唐詩)를 읽으며」]

1989년 6월 7일 김달진은 82세를 일기로 세상살이의 한 갈피를 접었다.

여기 한 자연아(自然兒)가

그대로 와서

그대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풀은 푸르라

해는 빛나라

자연 그대로.

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

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

[김달진, 「비명(碑銘)」]

시인이자 승려였으며, 한학자이며 교사로 일생을 살아 온 월하 김달진. 그는 시대에 편승하여 헛된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았고, 정의를 앞세워 굳세고 튼튼한 정신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 없는 듯하지만 있고, 우리 옆에 있는 듯하지만 없는 자리에서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유와 신비여, 오직 그대 하나만을 몸에 지닌 채 인간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나는, 인생의 평안과 조화, 덕과 사랑의 광명을 볼 수가 있다.

[김달진, 「산거일기」]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24 공휴일 명칭 변경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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