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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 해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10
한자 合浦海戰
이칭/별칭 학개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합포 -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
종결 장소 합포 -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
성격 해전
관련 인물/단체 이순신

[정의]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두 번째 해전으로 1592년 음력 5월 7일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 마을 앞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

[개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끈 판옥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전투를 벌여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머물러 있던 중 하오 4시쯤 왜선 5척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이를 쫓아가 웅천 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킨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는 전라좌수군만이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수군이 제대로 대응을 못해 일본군은 조선의 강토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개전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수륙 병진 전략을 펼쳐 일본 수군으로 하여금 서진하여 보급 지원을 할 예정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준비가 부족한 가운데 적을 맞게 되어 패퇴한 가운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조정에 허가를 얻은 후 전라좌수군을 이끌고 1592년 5월 4일 새벽에 출항하였는데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규모였다. 이 중 전투력을 갖춘 배는 판옥선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끈 4척의 판옥선, 2척의 협선과 연합하여 일본 함대를 찾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어서 벌어진 해전이 바로 합포 해전이다.

[경과]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은 경상도 소비포를 거쳐 당포에서 머무르던 중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군 4척을 맞아 함께 거제도 쪽으로 이동하여 1592년 5월 6일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보냈다.

1592년 5월 7일 새벽에 발선하여 천성, 가덕으로 향하던 중 정오 무렵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30척을 발견하고 전투를 벌여 26척을 분멸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를 옥포 해전이라고 부른다. 전투 후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 유숙할 준비를 하던 중 오후 4시쯤 ‘멀지 않은 바다에 또 왜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이를 쫓아 웅천 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랐다. 이에 전라좌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합력하여 적선 5척을 분멸시켰다.

[결과]

조선 수군은 일본 군선 5척을 모두 분멸시켰다. 분멸시킨 장수는 사도첨사 김완이 왜 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왜 대선 1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 대선 1척을, 전 첨사 이응화가 왜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송희립·김효성·이설 등이 힘을 합해 왜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의의와 평가]

합포 해전임진왜란 시기 현재의 창원[진해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이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에서 두 번째로 벌어진 해전으로, 당시 육전에서 연패를 당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임진왜란 극복에의 자신감을 수군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다만 이 해전은 배에 탑승하고 있던 일본군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버린 상태에서 적선만 분멸시켰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조선의 육군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이 벌인 해전의 한계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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