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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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酉再亂-鎭海地域海戰 |
이칭/별칭 | 제2차 안골포 해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제장명 |
발단 시기/일시 | 1597년 6월 18일 - 원균 안골포 방면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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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7년 6월 19일 - 제2차 안골포 해전 |
종결 시기/일시 | 1597년 6월 19일 - 제2차 안골포 해전 종결 |
관련 인물/단체 | 원균 |
[정의]
정유년(1597) 1월 이후 1598년 종전 시기까지 현재의 창원[진해] 지역에서 벌어진 해전.
[개설]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후 지금의 창원[진해] 지역에서 벌어진 해전은 1597년 6월 19일의 제2차 안골포 해전이 유일하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 진해 지역의 해전은 주로 제2차 안골포 해전을 의미하며, 통제사 원균이 지휘한 해전 중 가장 전과가 뚜렷한 해전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조선 수군의 통제사가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된 1597년 4월 현재 일본의 선발대인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리는 500여 척이 도해하여 울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가토의 배 500여 척이 울산 해구에 정박한 채 움직이지 않는 이유로는 군량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하였다. 그렇지만 추수를 하고 나면 반드시 움직일 것이므로 7~8월 사이에 움직일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움직이기 전에 조선 수군이 공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다만 조선의 수군이 자체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를테면 서생포의 일본군을 치기 위해서는 조선의 수군이 부산 쪽으로 왕래해야 하는데 안골포와 가덕도에 적이 주둔하고 있어서 방해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군의 본격적인 도발에 관한 정보들이 6월 초를 전후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속속 보고되었다. 그 주요 내용들을 요약하면 일본이 5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중 30만의 병력을 조선에 도해시켜 전라도와 제주도를 유린함은 물론 의령·경주의 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것이며, 그 시기는 6~7월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의 부산 앞바다 진공 작전은 지지부진하였다. 그것은 도체찰사와 도원수의 지시를 통제사 원균이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대마도에는 왜선이 부지기수로 도착하여 도해의 호기를 엿보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은 속히 출전하라고 통제사 원균을 압박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6월 18일에 통제사 원균은 안골포 방면으로 출전을 하였다. 원균이 출전하게 된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서가 아니라 도원수의 계속적인 독촉과 도체찰사의 명령을 전달한 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이공의 역할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경과]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6월 18일에 한산도에서 발선하여 날이 저물자 장문포에서 밤을 보냈다. 조선 수군은 이튿날인 6월 19일 아침 일찍이 학익진을 형성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였다. 그때 일본군들은 줄 지어 서서 해안에 잠복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암석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수군의 제장들이 전진했는데, 일본군도 배를 타고 싸움을 걸어와 서로 응전하였다. 포탄과 화살이 함께 쏟아져 해안이 진동하는데도 조선 수군들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마침내 일본 함대에 육박하여 많은 적을 살상하자 일본군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해안 위로 도망쳤다. 이에 조선 수군은 적선 2척을 노획하였다.
이어서 공격 대상을 가덕도로 향했는데 가덕도의 일본군은 이미 안골포에서 내원하다가 배를 타고 그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조선 수군이 급히 배를 저어 추격하여 거의 모든 적선을 포착하기에 이르자 일본군들은 마침내 배를 버리고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갔다. 조선 수군의 장졸들이 포위하고 난사하였으나 그들 배만 빼앗았고 섬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이 포기하고 돌아올 즈음에 안골포의 일본군들이 또 배를 타고 역습해 왔으므로 조선 수군은 다시 돌아서 접전하였다. 일본군들이 조총을 난사하자 조선 수군도 방패에 의지하여 화살을 다발로 쏘아대며 점차 유인해 나오다 날이 저물자 파하고 돌아왔다.
[결과]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를 보면 평산포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탄환을 맞는 부상을 당하였고, 그 밖의 하졸들은 하나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 다만 보성군수 안홍국이 끝내 이마에 철환을 맞아 뇌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한 명의 장수가 전사했지만 적선 다수를 노획했을 뿐만 아니라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전과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원균은 그날 하루 종일 접전 후 바로 한산도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안골포의 적 전력이 강하지 않으므로 계속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이러한 지시를 묵살한 채 출전을 회피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는 향후 출전할 때도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강하게 질책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유년 진해 지역에서 벌어진 유일한 해전인 안골포 해전은 일본군의 도해 후 추가 도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부산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도해를 막도록 하라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진공하라는 전쟁 지휘부의 명령이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수군 지휘부의 판단과 배치됨에 따라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출전하라는 조정의 지시와 출전이 어렵다는 수군 지휘부의 입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전이었다. 즉 부산으로 출전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안골포의 적들에 대한 공략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한 수군 지휘부의 결심에 따라 출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수군 형편으로는 당연한 결정이었고, 이에 대한 공격은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1593년(계사)에 웅포에 있던 적을 공격하던 이유와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당시 이순신으로서도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주둔하고 있는 웅포의 적들을 먼저 물리쳐야만 부산으로 출동했을 경우 배후에서 공격당할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승리했지만 정유년 초기의 전장을 부산 지역과 경상우도 일부 지역으로 묶어두려고 했던 조선 조정의 의도에는 미흡했다. 결국 현장에서의 수군 상황에 대해 무지하였던 조정에서 과도한 기대하고 무리하게 지시한 결과 결국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