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26 |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를 따라 진해 웅천에 와서 활동했던 스페인 출신 종군 신부.
[개설]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는 스페인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제1선봉장이면서 가톨릭 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을 따라 진해 웅천으로와 활동한 종군신부이다. 진해 웅천 왜성에 도착한 것은 1593년 12월 28일이었으며, 약 1년 넘게 체류하면서 천주교 신자인 일본의 다이묘들과 병사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때 웅천 왜성에는 오타 줄리아 등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가 있었으므로 이들은 세스뻬데스 신부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활동 사항]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1551~1611]는 임진왜란의 제1선봉장이면서 가톨릭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초청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웅천 왜성을 축성하여 머물면서 신부를 초청한 것이었다. 세스뻬데스 신부의 도래와 체류는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임진왜란의 침략자인 일본의 ‘종군 신부’였다는 이유로 잘 알려지지 못했다.
세스뻬데스가 ‘조선에서 보낸 서신’, 네 건을 통하여 임진왜란과 당시 조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제1서신은 조선 도착 직후에 쓴 편지이다. 이 서신에는 그가 조선으로 오는 과정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1593년 성탄절에 조선에 도착하기 위해서 12월초 나가사키를 떠나 쓰시마에서 18일간 체류하였다. 신부는 성탄절을 웅천에서 보내기 위하여 4일 전에 60척의 일본 함대에 편승하여 출발하였으나 폭풍 때문에 쓰시마로 되돌아갔고, 12월 27일 쓰시마를 떠나 그 다음날인 28일 웅천 왜성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 서신에서는 평화협상의 어려운 상황을 기록하면서 “꼬라이[한국]에서 평화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고니시의 정적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행위를 비판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 지르고 뒤엎어버리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제2서신은 고니시와의 만남과 환대, 웅천왜성 내 자신의 숙소 및 선교활동상황, 고니시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및 고니시의 절친한 벗들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소 요시토시의 문화재 약탈 등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웅천 왜성 내의 굶주림과 추위, 질병 등을 전하면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제3서신은 강화 교섭에 관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제4서신에서는 신부가 웅천성 뿐만아니라 인근 여러 곳을 은밀히 다니면서 선교활동에 힘쓴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상훈과 추모]
웅천으로 이어지는 바닷가에 사도 마을이 있다. 그 바닷가에는 탕수 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주민들 대부분이 서양인 신부가 상륙한 곳이라 전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자그마한 세스뻬데스 기념공원이 있다. 그 공원에는 세스뻬데스 도래 기념비도 있다. 기념비는 신부의 고향 사람들이 신부의 조선 방문 400주년을 기념해, 1993년 진해시를 방문했을 때 선물한 것이다. 기념비의 내용이다.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스페인 예수회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의 방한 400주년[1593~1993]을 기념하여 또레도의 비야누에바 데 알까르데떼 시민들이 진해시민들에게 헌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