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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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川都護府 |
이칭/별칭 | 웅지현(熊只縣),웅신(熊神),웅천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조선 중종 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의 옛 지명.
[개설]
조선 초기 웅천현이었던 현재의 진해는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을 맞아 그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해에 웅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512년 다시 웅천현으로 환원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제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이 웅천에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정되었고, 특히 삼포 왜란을 통해 이 지역 안보와 지리적 위상이 매우 중시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웅천현을 웅천 도호부로 격상시켜 관할하였다.
[관련 기록]
『중종 실록』,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 도서(輿地圖書)』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내용]
웅천(熊川)은 경상남도 창원시의 진해구에 속한 옛 지명으로 고대에는 가야 연맹체에 속하였다가 신라에 편입된 지역이다. 삼국 시대인 신라 때에는 웅지현(熊只縣)이었으며, 완포향(莞浦鄕)은 웅지현과 골포현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 웅지현은 웅신현으로, 골포현은 합포현으로 개칭되어 의안군(義安郡)[훗날의 창원]에 속하였다.
고려 시대에 들어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金州)의 속현으로 합병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완포향이 현으로 승격하여 합포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조선에 들어 세종 대에 첨절제사가 설치되고, 1452년(문종 2) 웅신현[지금의 웅천동]·완포현·천읍부곡[지금의 웅동]이 통합되어 웅천현으로 개편되었다. 1510년(중종 5)에 삼포 왜란을 진압하면서 웅천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512년 현으로 환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오늘날 진해인 조선 시대 웅천은 일본과의 통교상 중요한 지리적 위상을 가짐으로써 한때 웅천 도호부까지 승격된 유서 깊은 곳이다. 그만큼 이 지역이 조선 시대 교역과 안보에 중요한 곳이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