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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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倉 |
이칭/별칭 | 회원창,우조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개정 시기/일시 | 1408년 - 회원창에서 마산창으로 개칭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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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1760년 - 마산창 재창건 |
관할 지역 | 마산창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일대에 있었던 조창.
[개설]
마산창은 마산 지역에 조선 시대 때 설치된 조창이다. 석두창과 같은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석두창이 있었던 자리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마산창이라는 이름은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는 각각 가까운 곳에 따라, 김해(金海)의 불암창(佛巖倉), 창원(昌原)의 마산창(馬山倉), 사천(泗川)의 통양창(通洋倉) 등으로 나누어 수송”한다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卷) 150, 경상도(慶尙道) 조에 처음 보인다. 고려 시대 때 회원창(會原倉)이었으나 1408년(태종 8)에 의창현과 회원현이 통합되어 창원부가 됐기 때문에 회원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해 마산창이라 부른 것이라 판단된다.
[변천]
세종 이후 마산창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조창으로서 기능을 유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마산창은 1760년(영조 36)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때 마산창은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과 더불어 영남 3조창이 되었고 각각 우조창(右漕倉), 후조창(後漕倉), 좌조창(左漕倉)이라 불렸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마산창은 20척의 조운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창원(昌原)·함안(咸安)·칠원(漆原)·진해(鎭海)·거제(巨濟)·웅천(熊川)·의령(宜寧)의 동북면(東北面)·고성(固城)의 동남면(東南面) 8개 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