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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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川縣 |
이칭/별칭 | 웅구,웅신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제정 시기/일시 | 1452년 - 웅천현 김해도호부에서 분립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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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1510년 - 웅천현 웅천 도호부로 승격 |
개정 시기/일시 | 1512년 - 웅천현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 |
개정 시기/일시 | 1895년 - 웅천현에서 웅천군으로 개칭 |
개정 시기/일시 | 1908년 9월 - 웅천군과 진해군 창원부로 통합 |
개정 시기/일시 | 1955년 1월 - 웅천현 지역 진해시로 승격 |
관할 지역 | 웅천현(熊川縣)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설치된 행정 구역.
[개설]
웅천현(熊川縣)은 1452년(문종 2)에 웅신(熊神)·완포(莞浦)의 두 현과 천읍부곡(川邑部曲)을 통합하여 웅천현(熊川縣)으로 승격하면서 설치되었다. 웅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수군 진(鎭)이 있었던 관계로 무관이 배치되었다. 웅천현을 보호하는 성(城)으로는 진해 성내동, 남문동, 서중동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웅천 읍성(熊川邑城)이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웅천현은 이 지역에 상주하는 왜인이 증가하여 그 피해를 입기 쉽고 해안의 요충지임을 감안하여 현으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록]
『세종 실록』에는 웅신현(熊神縣), 즉 웅천현에 왜구를 방어할 성을 쌓게 하였고, 승격시켜 상주 왜인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세종 실록 지리지』에 웅천현으로도 부른 웅신현은 본래 웅지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
웅천현은 옛 웅지현을 신라 때에 웅신현으로 고쳤으며, 웅천현으로도 칭하였다. 본래 의안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김해 도호부 소속의 웅신현이었고, 조선에 이르렀다. 웅신현은 1437년(세종 19)에 수군첨절제사를 두고 ‘웅구(熊口)’라고도 하였고, 1452년(문종 2)에 웅신·완포(莞浦)의 두 현과 천읍부곡(川邑部曲)을 통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하여 김해도호부에서 분립하였다. 이러한 개편은 이 지역에 상주하는 왜인이 증가하여 그 피해를 입기 쉽고 해안의 요충지임을 감안한 조치였다.
[변천]
웅천현은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 때 왜구 평정의 공로로 ‘도호부’로 승격이 된 적이 있으나 1512년에 복현되었다.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행정 구역상 변화는 없었다. 1895년(고종 32) 5월 칙령 제98호에 의해 전국 행정 구역이 23부 336군으로 개편되었는데 웅천현은 웅천군으로 개칭되어 진주부 소속이 되었다. 23부제는 곧 폐지되었고 이듬해 8월 칙령 제36호로서 13도제로 바뀌었다. 1906년 9월에는 칙령 제49호로 공포된 지방 구역 정리에 따라 웅천군 관하 8개 면의 구역도 정리 개편되었으며, 1908년 9월 칙령 제69호로 진해군과 웅천군을 개편하여 창원부에 통합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1955년 9월 1일부로 진해시로 승격되면서 행정 구역을 20개 동으로 획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웅천현에 있던 웅천 읍성(熊川邑城)은 현재까지 성벽이 양호하게 남아 있어 조선 시대 읍성의 구조적 측면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