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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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時期昌原-農民組合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에서 지주와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횡포에 맞서 소작 관계 개선과 농조 건설을 위한 농민 운동.
[역사적 배경]
지나친 소작료의 징수 고리대의 악용 등 농민들은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 마름들의 농간과 그들에 의한 소작권의 빈번한 이동으로 소작 농민들의 삶이 매우 힘들어졌다. 이에 지주와 동척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 조합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경과]
1928년 4월 웅천면 지역의 소작 농민들은 웅천 소작 조합을 창립하였다. 웅천 소작 조합은 이후 농조(三鎭)로 조직 개편하였다. 조직의 중심인물은 조성진(趙性鎭), 정운조(鄭云朝), 김창업(金昌業) 등이었다. 이들은 창립과 동시에 ‘이모작답에 대한 2중 소작료 철폐, 소작권 확립, 악지주 퇴치, 부정 소작인 퇴치’ 등 주로 소작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웅천 소작인 조합은 소작인의 부정을 퇴치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창원 지역에는 남면 농조(南面 農組)[1927년 10월 창립], 삼진 농조(三鎭 農組), 진해 농민 조합 연합회 등 다수의 소작인 조합과 농조가 있었는데 군 단위의 통일적인 농조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는 알 수 없다.
창원 지역에서는 1932년 4월 경 조맹규(曹孟奎), 이승종(李承綜) 등 웅동면 지역의 활동가들이 농조의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활동을 벌이다가 검거되었는데 웅동 적농조직 혐의 사건(熊東 赤農 組織 嫌疑 事件)으로 위의 활동가들이 1931년 12월부터 공산주의의 선전을 기획한 뒤 부근 청년에게 18회에 걸쳐 사상 강좌를 개최하고 이들을 포섭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려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조맹규는 출소 이후 웅동, 부산, 마산 등지에서 경남 적색 노조를 건설하는 활동을 하다 다시 검거되었다.
북면 지역에서는 1932년경 조영규(曺永奎), 김태희(金泰熙), 이상재(李相才) 등이 20여 개의 야학회를 망라하여 창원 적색 노동 야학회를 조직한 혐의로 1933년 5월 검거되었다. 이들은 북면 화천리에 있던 기존의 북면 농촌 교육회를 장악한 후 이를 매개로 무산 아동에 대한 적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상남면 지역의 활동가 안소주(安小周), 이안호(李安鎬), 이교현(李敎鉉), 이해룡(李海龍), 문상갑(文尙甲) 등은 경성콤 그룹의 지도로 1940년 10월경부터 혁명적 농조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남면 지역의 활동가들이 경성콤 그룹과 조직적으로 결합된 것은 1940년 2월 출옥한 권우성이 1940년 4월 이안호와 접촉하면서부터였다. 권우성은 1940년 5월 경성콤 그룹에 가입한 이후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상남면 지역의 활동가들을 접촉하면서 “과거의 활동을 비판하고 장래 농민 조합은 면 단위로 건설해야 하나 의식 수준이 낮으므로 우선 ‘그룹’을 조직하여 ‘집단적인 교양’을 해야 한다”라고 지시하였다. 또 1940년 9월경에 권우성은 안소주에게 농조 활동을 위한 상황 조사를 지시하였고 조사 항목은 지주·고리대금업자, 반동분자·스파이의 활동 실태, 지주·부농·자작농·자작 겸 소작농·소작농의 동리별 숫자 및 소작 관계, 농민의 최대한 불평불만 사항 등이었다. 상남면 지역의 활동가들은 ‘주거 단위 또는 경영 단위로 농민 조합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조직 건설 방침으로서 ‘리 단위로 3~5인으로 구성된 분회를 1개씩 건설하고 조직이 발전하면 각 분회 책임자 1인을 선발하여 면 단위로 혁명적 농조를 건설한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결과]
상남면 지역의 경우 혁명적 농조의 건설이 1941년 12월 경성콤 그룹의 검거와 더불어 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상남면 지역 소작인의 항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마창 사회 단체 협의회와의 긴밀한 연락 속에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