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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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廓 |
이칭/별칭 | 운문생(雲門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남재우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 안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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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안확 마산 창신 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안확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 안확 사망 |
수학|강학지 | 안확 수학 - 서울 수하동 소학교 |
수학|강학지 | 안확 수학 - 일본 니혼 대학 |
성격 | 국학자|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순흥(順興) |
대표 관직|경력 | 마산 창신 학교 교사|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국학자.
[개설]
본관은 안흥.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활동 사항]
안확(安廓)[1886~1946]은 서울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교육받고 독립 운동과 국학 연구에 참여하였다. 마산 창신 학교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일본에 유학하여 정치학을 수학하기도 했다. 독립 운동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국학 연구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는데, 역사 연구, 문학 연구, 전통 음악인 아악 연구 등의 분야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서울 수하동 소학교 6년 과정을 마친 것은 1901년으로 15세였다. 이후 10대 후반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은 적지만, 저서인 『조선 문학사』에서 “교육이 진작할 때 나도 서북지방에 돌아다니면서 학교를 연 것이 여러 곳이며 직접 가르친 것도 여러 해에 걸쳤다.”고 술회하고 있으므로, 1900년대의 애국 계몽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안확은 서울을 떠나 마산으로 내려가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 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4년에 신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 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하고, 1916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태와 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 국권 회복단의 마산 지부장이 되었다. 이 활동 과정에서 1918년 이회영이 주도한 고종 해외 망명 유치 계획에 관여했다.
이러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국학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7년 최초의 저술인 『조선 문법』을 출판하였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4월 3일 안확이 이끌었던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가 창원군 진동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해 두 번째 저술인 『조선 무사 영웅전』을 출간하였다. 3·1 운동 이후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출간된 조선 청년 연합회 기관지인 『아성(我聲)』의 편집책이 되었다. 1921년에 북경을 다녀오고 이듬해에 신천 지사의 편집인이 되어 사회적 활동을 하는 한편 문필 활동도 왕성하였다. 1922년에 『조선 문학사』, 1923년에 『조선 문명사』를 간행하였다. 1923년 약 3년간의 공백기를 지나 1926년 한 해에 안확은 어학에 관한 논문 5편, 음악에 관한 글 1편, 고대사에 관한 것 3편 등을 발표하여 학구열을 과시했다. 1928년 아악의 연구와 정리를 위하여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의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민족 문화 연구와 문필 활동에 전념해왔던 안확은 회의에 빠져들어 1933년부터 유랑 생활에 들어갔다. 일제 식민 통치가 군국주의화 되면서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가 없게 되자 유랑생활의 많은 시간을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보내었다. 1938년 5월 「언문(諺文)과 문화급 민족성(文化及民族性)」이란 글이 『정음(正音)』에 실린 것으로 보아 이때가 유랑생활을 끝낸 시점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940년까지 약 3년간 어학·고구려 문학·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글을 썼다.
[학문과 저술]
초기의 대표적 연구 분야는 국어와 국사에 관한 것이었다. 국어학 연구에 있어서 그는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조직적 정신의 결정으로 보고 기록용 문자인 한문에 대해 민중들이 사용하던 말, 즉 구어(口語)를 적기 위해 만들었다는 뜻에서 언문(諺文)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글의 제자원리가 세종 초년의 음악 정리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는 악리기원설(樂理起源說)을 제시, 일인 관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주장한 범자(梵字) 모방설이나 몽고자 모방설 등을 부정하였다. 그는 국어의 본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국어와 다른 언어를 비교하고 국어의 계통과 역사를 연구하였다.
또한,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한글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자고 주장하자, 그것은 언어와 문자를 혼동하는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언한문(諺漢文) 혼용을 주장하고,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를 비난하였다. 맞춤법 문제에 있어서는 민중을 위해 편리한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맞춤법을 큰 수정 없이 쓰자고 주장하였다.
국사학 분야에서의 대표적 업적은 1923년에 간행된 『조선 문명사』로 8권 중의 「조선 정치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명 진보론의 관점에 입각, 민족의 생활사를 대변하는 정치사의 발전 과정을 정치 체제의 변화라는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시대 구분에 반영되어, 상고의 소분립 정치 시대로부터 중고의 대분립 정치시대로, 그리고 다시 근고의 귀족 정치 시대로부터 근세의 군주 독재 정치 시대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의 배경에는, 민족의 역사는 꾸준히 개선, 진화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 안확은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지배층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일반 민중의 정치에의 참여 정도인 자치제의 발달이란 기준에서 추구하고 있다. 곧 자치제의 발달과 정치체제의 변화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장 주목된 것은 향촌사회에서 일반민의 의사가 결정되는 촌회였다. 민중을 기준으로 한 역사 발전의 이해는, 당시의 애국 계몽 운동기에 추구된 자유 민주주의의 근대적 민중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궁중음악의 악기·악곡 등을 정리하고 외국 음악과의 관계를 연구하였으며, 민중 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음악 연구를 바탕으로 문학 사상에 존재한 가시(歌詩)들을 검토, 가시를 삼대목체(三大目體)·정읍체(井邑體)·첩성체(疊聲體)·경기체(景幾體)·장편(長篇)·시조(時調) 등으로 분류, 최초의 시조연구서인 『시조 시학(時調詩學)』을 내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일인 학자들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단군조선의 문화에 대한 글을 비롯한 고대사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와 동시에 민족 문화의 전통의 일부로서 미술사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이러한 안확의 국학연구는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지적 풍토 속에서 더욱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엄밀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그 발전 과정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검토하였다는 점은, 이후 국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아울러 민중의 역사 창조 능력에 대한 신뢰와 민중 주체의 역사관은 민족 문화 전통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저서로는 『조선 문명사』, 『조선 문학사』, 『조선 문법』, 『조선 무사 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시조 시학』, 『자산 안확 국학 논저집(自山安廓國學論著集)』[199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