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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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月影臺 |
이칭/별칭 | 월영대(月影臺)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밤밭고개로 442[해운동 8-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3년 1월 8일 - 창원 월영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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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창원 월영대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
건립 시기/일시 | 1713년 - 월영 서원 창건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9년 - 월영 서원 훼철 |
현 소재지 | 창원 월영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밤밭고개로 442[해운동 8-4] |
성격 | 서원 |
관리자 | 월영대 사적 관리위원회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서원.
[개설]
월영 서원(月影書院)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월영대(月影臺)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1713년(숙종 3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업적을 추모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최치원이 생전에 자주 거닐던 곳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위치]
창원 월영대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밤밭고개로 442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월영 서원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자료에 따라 이견이 있다. 경상남도의 서원 자료 목록에는 건립 연대가 1850년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1713년으로 되어 있고, 『마산 시사』에는 1846년(헌종 12)으로 기록되어 있다.
월영 서원은 1869년(고종 6)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서원의 존재나 유허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월영당(月影堂) 또는 월영대라는 이름의 유적이 남아 있다. 월영대는 최치원이 자주 들러 시간을 보낸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 제32권 창원도호부편 고적조에는 “월영대는 회원의 서쪽 바닷가에 있다. 최치원이 놀던 곳이며, 글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는 내용을 통해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정지상(鄭知常), 김극기(金克己), 채홍철(蔡洪哲), 안축(安軸), 박원형(朴元亨), 정이오(鄭以吾) 등의 월영대 찬시가 소개되어 있어 많은 선비들이 최치원의 학덕을 기려 이곳을 찾아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최치원은 통일 신라 말기의 사람으로 12세 때 당에 유학하여 18세에 당의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고 25세에 귀국하였다. 신라 헌강왕 때에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경상남도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월영대 등에서 소요하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1932년에 최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를 세웠고 두곡리에 영당(影堂)을 지어 그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특히 고운 선생의 학덕을 기려 훗날 퇴계 이황 등 학자 선비들이 ‘월영대’를 예찬하는 글귀를 남겼다.
[형태]
월영대는 보호 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유허비가 있으며, 해서체로 ‘월영대(月影臺)’라고 쓴 돌이 동북쪽에 있다.
[현황]
월영대는 1932년에 20평 남짓한 대지 위에 ‘월영대’ 비각과 ‘척강문(陟降門)’ 그리고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에서도 ‘문창공 최선생 유허비(文昌公崔先生遺墟碑)’는 후손들이 선생을 기려 건립한 비석이다. ‘월영대’라고 쓴 최치원의 친필 화강암 석각물만 원형대로 전해지고 있다. 월영대는 1993년 1월 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