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9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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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日本神社 |
분야 | 역사/근현대,종교/신종교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고운로 65[문화동 14-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성진석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설립 목적]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 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 천황·유명 귀족·무사·문신·조상신 등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여러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의 신을 모시는 신사, 된장 신을 모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 신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 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등이 있고,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도하 신사(稻荷神社)라고 하는데, 광복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마산을 포함해 서울특별시 남산, 인천, 목포, 부산, 진해, 진남포, 신의주, 용천, 성진 등지에 있었다. 마산 일본 신사의 본전에는 천조대신을 봉안했지만, 경내 오른쪽에 여우를 모신 도하 신사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 신사(松尾神社)를 병설했다.
마산에 송미 신사를 특별히 세운 것은 마산이 술의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마산의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해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청주의 6할이 마산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송미 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변천]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신사는 부산 신사인데 17세기에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후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이 체결된 후 각 지역의 각국 공동 조계(租界)에 일본 거류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들이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산 조계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1909년에 일본 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의 건의로 마산 신사가 세워졌다.
세이죠는 마산에 사는 일본인 유지들과 신사 창건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마산 이사청을 방문해서 이사관으로부터 마산 해관장 사택 예정지에 신사 조성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세이죠의 말에 의하면 마산 신사는 ‘거류민으로서의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 시기는 조선 총독부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신사 정책을 펴기 전이였으며, 따라서 마산 신사는 마산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신앙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산 신사가 있던 자리는 현재 제일 여자 고등학교 뒤쪽으로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원래 산이었다. 신사로 오르는 길 양옆으로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의 산제당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으로 잘 정비된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쪽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마산시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 정책을 상징하는 두 쌍벽이 나란히 있었던 셈이다. 고(故) 김형윤의 글에 의하면 대포는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된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마산만 중포병 대대 입구의 산정에 두었다가 대대장이 1935년 마산부에 기증했고, 마산부는 이것을 신사 앞에 거치시킨 것이라고 한다. 광복 후에도 대포는 공터에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진일 철공소’라는 고철 공장이 당시 마산시의 허가를 받아 망치로 두들기고 분해해서 뜯어 갔다고 한다. 비록 일제 강점기의 유물이지만 이를 역사적으로 증언하는 중요한 유물이 고철로 취급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동시에 조선신궁에 안치해 두었던 어령대를 동경 궁내성으로 돌려보내고 각 지역의 신사에서는 신령을 하늘로 해서 본국으로 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 일제히 실시하였다. 마산 신사의 승신식은 9월 4일에 진행되었다.
신사 주변과 신사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던 수많은 벚꽃나무들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주민들에 의해 땔감으로 이용되었다. 물론 반일 감정도 있었지만 광복 후의 심각했던 물자난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건축 자재를 구하는 것도 어려워서 새로이 집을 짓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고쳐 쓰기도 했다. 신사 건물은 ‘신마산 교회’에 의해 잠시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47년 제일 여자 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 가정 여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교사(校舍)로 사용하였다. 가정 여학교는 신사의 본전 건물을 교무실과 교장실로 썼고, 부속 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부속 건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서 허물 당시까지 학교 민속관으로 사용해 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총독부는 1915년에 신사 설립의 기준과 그 인가 절차를 정한 「신사 사원 규칙」을 발표하고, 일본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각 지역 대부분의 신사들이 총독부로부터 공인, 정리되었으며, 1925년에 일제는 우리나라 내에서의 신사 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서울 남산에는 5년여의 공사 기간에 걸쳐 조선 신궁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조선 신궁은 한반도에 이주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 문화와 신앙심까지도 교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 신궁 건립을 계기로 신사는 조선인에게 황국 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여 조선인을 일본인화(日本人化) 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기독교 탄압으로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의 일제는 중국 대륙 침략의 첫발로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이어서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으며,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일제가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조선인의 정신적 통일과 순종의 자세였다. 일제는 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기관, 학교, 민간 유지, 종교 단체로 하여금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이었다. 그 이듬해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조직되었는데, 그 하위 기관으로 애국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애국 반원과 경찰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매일 아침 시민들의 참배 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 말기에 애국 반원은 4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황]
현재 학교와 그 주변에는 당시 신사의 흔적이 더러 남아 있다. 학교 안과 바깥에 있는 길고 넓은 돌계단도 옛 신사 계단이다. 이 돌계단은 일제 강점기 마산의 근로 봉사 작업이라는 명목의 강제 노역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근로 봉사 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제일 여자 고등학교에 가면 입구의 돌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이 교정의 정원석으로 남아 있고 담벼락에는 축조 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을 음각한 돌도 박혀 있다.
한편 마산 제일 여자 고등학교의 정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설립자 이형규에 의하면 이 문은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 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