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1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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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帝皇山山神靈-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정헌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8년 - 「제황산 산신령의 노여움」 『진해 스토리』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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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제황산 - 창원시 진해구 태평동 |
성격 | 전설|역사담 |
주요 등장 인물 | 묘법사 주지|진해 요항 사령관|백발노인 |
모티프 유형 | 러·일 승전기념탑 건설 일화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전승되는 역사담.
[채록/수집 상황]
『진해 스토리』[진해시, 2008]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진해 관광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일대를 제황산이라고 한다. 전하는 속칭은 부엉등 또는 부엉산이라 하고 탑이 세워진 봉우리만을 두엄봉이라고도 불렀다. 일본인들이 산세가 투구를 닮았다고 가부토야마라고 하던 것을 광복 후 개칭하면서 제황산으로 하였다.
풍수설에 이르기를 부엉등 북쪽에 제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날 산봉우리에 임금이 나지 못하게 그 기세를 누르고자 일본 해군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가져오게 한 1905년 5월의 해전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여 봉우리를 깎아 평평하게 만든 날 밤, 묘법사의 일본인 주지 아사이 간세이의 꿈에 백발노인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준엄하게 말하기를 “일본 해군의 무도한 자들이 나의 두상을 깎아버리니 상처를 입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다. 너는 도를 닦는 일본인 승려니 진해 일본 해군 사령관에게 공사를 중지하여 산꼭대기를 복구하고 다시는 무례한 짓을 하지 말도록 전하라. 내가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재앙이 내려질 것이다. 명심하여라.” 라고 하였다.
묘법사 주지는 날이 새자 당시 일본 해군 진해요항부의 사령관에게 산신령의 노여움을 알렸으나 사령관은 코웃음만 쳤다. 이를 무시한 일본 해군에서는 제황산에 탑을 세우는 공사를 진행하고, 일본 교통성에서는 진해와 창원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진·창선 개통은 매우 뜻이 깊어서 개통 축하 기념식과 부대 축하 행사를 열었고, 이날 하루만은 주최 측에서 무료로 교통편을 제공하자 관광객이 진해로 몰려들었다. 마산에서 진해로 오면 선편이 지름길이었고 바다 경치도 즐길 수 있어서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 마산 진해 사이의 객선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정오 무렵 마산에 본사를 둔 진해기선회사 소속 제3진해환이 정원을 훨씬 넘는 여객을 싣고 좌우에도 80명씩 태운 종선(從船)을 달고 마산 부두를 출항하였다. 도착한 배를 현동만 부두에 대려고 하면서 오른편 종선의 밧줄을 풀어 승객을 내리려 하자 왼편에 딸린 종선의 무게로 말미암아 제3진해환이 왼편으로 기울어져 승객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혼란이 일어났다.
기울어진 제3진해환이 뒤집히자 선실에 있던 승객이 배와 같이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불과 2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근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수병들이 비상소집을 하여 구조 활동을 하였으나 연약한 부녀자 25명은 불행하게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현동 부두에서 참변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공사를 진행하였다. 백발노인은 초조해진 모습으로 다시 묘법사 주지의 잠결을 놀라게 하였다. “너에게 당부를 하여도 일본 해군 사령관이 말을 듣지 않아 바다에서 내 영적을 보여 주었는데도 믿지 않고 덤비니 다시 경고한다. 공사를 곧 그만두고 부엉등을 본래대로 다듬지 아니하면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다.”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겁에 질린 묘법사 주지는 다시 사령관에게 현몽대로 알렸으나 주지를 맞는 사령관은 전과 다름없이 들은 척도 아니 하였다.
제황산에 탑을 세우고 공사는 케이블카를 가설하여 석재를 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재를 가득 싣고 오르던 케이블카의 쇠줄이 갑자기 끊어져 벼락 소리와 함께 케이블카가 떨어지고 말았다. 중국인 석공과 잡역을 하던 한국인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일본인 감독과 석공들이 사상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으니 현몽을 묵살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다.
연이은 현몽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공사 강행으로 제황산 기념탑이 완공되던 어느 날 묘법사 주지에게 다시 나타난 신령은 “네 놈이 무거운 짐을 머리 위에 얹어 놓아 나는 힘이 빠져 버렸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끝내 탑을 세우고 말았으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나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영적을 보여 주리라.” 하였다. 이런 현몽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대한 축하 행사를 하며 기념탑의 준공을 기뻐하였으나 이듬해에는 끔찍한 두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하나는 성주사에서 장복산 굴을 지나 경화동으로 내려오던 열차가 굴속에서 화재를 일으키며 멈추고 만 것이다. 기관사가 점검을 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다음의 이변은 그들 일본의 육군 기념일인 1930년 3월 10일에 진해만요새사령부 내의 연무장과 목공장으로 쓰는 창고를 임시 영화상영장으로 하여 어린이들에게 영화를 보이려 할 때 일어났다. 이 날의 기념행사에는 기념식을 마친 뒤에 어린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는 홍보가 되어 있어서 상영 시작 전 이미 어린이들은 250명가량이 입장하여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어린 구경꾼들이 상영장에 가득 찼지만 상영 책임자인 주임은 시작 시간에 맞추려고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이들은 떠들어 장내가 소란하여지자 초조해진 조수가 영사기의 조작 잘못으로 불을 내었고 그 불길은 삽시간에 스무 권의 필름에 번져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는 암흑으로 변했다. 이 날 사고로 107명이 사망하였는데 한국인은 단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모티프 분석]
「제황산 산신령의 노여움」은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이 제황산에 러·일 전쟁 기념 승전탑을 세울 당시의 일화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제황산의 ‘지명 유래담’도 일부 수용되어 있다. 승전탑을 세우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할 때부터 묘법사의 일본인 승려의 꿈에 나타난 산신령은 진해를 지키는 혼령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러 공사 중의 사고들에서 일본인들만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이 지역 주민들의 항일 정신과 맞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