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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싣고, 희망 싣고 다녔던 황포돛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201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정헌

석교마을은 마산항으로 드나드는 각종 크고 작은 선박들을 볼 수 있는 마산항의 아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창원공단에서 생산되는 각종 상품의 대부분도 이곳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는 등 물류 이동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바닷길이 일제강점기에는 황포돛배의 뱃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석교마을 사람들은 황포돛배를 ‘장배’라고도 불렀는데, 이렇게 부른 연유는 이 배가 석교마을에서 출발하여 마산의 남성동(현재의 어시장) 5일 장날에만 운항했기 때문이다.

이 장배는 후에 통통배로 대체되었는데, 육로가 개설이 된 1974년까지 석교마을 사람들이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가 이 바닷길이었다.

1981년이 되어 버스가 마을로 운행되기까지는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이 해로(海路)가 학생들의 통학길이며 마을 어른들의 나들이 길이었던 것이다.

물론 육로로 진해로 통하는 소로(小路)가 나 있었지만 큰 장이 서는 마산과는 거리가 있어 이 길은 잘 이용하질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진해 경화장이 있었지만 마산 어시장 보다 좋은 가격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조개를 주로 마산에서 판매했던 것이다.

당시 황포돛배의 선주였던 김시전(1920년 출생) 옹은 아직도 귀산본동에 생존해 있지만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바깥출입도 거의 하지 않으며, 가끔 바로 밑에 집에 사는 친구 분의 도움으로 거동을 하고 있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김시전 옹을 알고 있는 친구 분들에 따르면, 김시전 옹은 그 당시 조또찬이라는 사공을 고용해 황포돛배를 운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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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전 옹

황포돛배의 주요 항로는 귀산동과 마산의 남성동으로, 귀현이나 귀곡 등 몇 군데를 거쳤다고 한다. 장날에 맞추어 운항했는데, 주요 물품은 마을 남정네들이 매일 산에서 구한 나무(화목)나 여자들이 작업한 개발(조개를 이렇게 부른다) 등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어시장에 팔아서 돌아올 때는 생활에 필요한 두부나 싸대기(쌀을 이렇게 부른다), 생필품 등을 구해 싣고 왔다는 것이다.

당시 운임은 5전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1원이면 제사상을 차릴 정도였다고 하니 결코 싼 값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렇게 돛배가 몇 년간 운항되다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통통배(동력선을 이렇게 부른다)로 대체되어 학생들 통학도 이 배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동력선은 매일 운항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외출이 잦아지고 훨씬 편하게 되었다고 한다. 운임은 현금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추수철 쌀 몇 되를 운임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뱃길은 1981년 마침내 마을로 버스길이 열림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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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과 귀산을 왕래했던 황포돛배

일제강점기 황포돛배[일명 장배]를 이용하여 남성동 시장을 왕래하여 생활비를 마련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킨 억척 같은 할머니를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귀산본동에 살고 있는 김옥주(여) 할머니인데 “개발 캐러 바닷가로 내려가, 개발을 캐면 30~40키로는 되었는데 이것을 마산장날에 새벽 6시 출발하는 첫 배로 팔러 갔어. 한 손은 이고 있는 다라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낙비같이 타 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빨리 가려고 앞뒤로 흔들건만 배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고 떠나 버리네. 짐 좀 내려놓고 쉬고 싶으나 내려 줄 사람 없어 그대로 이고 귀곡선창 2키로 길을 향해 가니 눈앞은 소낙비 같은 땀이 흘러내리고 마침 만난 개울을 건너지 못해 애타할 때 반갑게도 귀곡사람 공창 문관 김 아무개가 나를 잡고 개울을 건네주니 이 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을소냐. 귀곡선창으로 가는 것은 첫 배가 귀산을 출발해서 석교 가서 사람과 짐을 싣고 다시 용호 가서 사람 싣고 짐을 싣고 귀곡선창 도착해서 사람 싣고 짐 싣는 동안 갈 거라고 계산한 것이 또 그 배를 놓치고 나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라고 당시를 기억하였다.

또 해방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조개를 캐서 팔 줄을 몰랐는데 해방이 되고 동력선이 운항되면서 비로소 조개를 캐서 마산이나 진해 등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조개를 캐서는 이웃끼리 나눠 먹거나 선물로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보제공자]

이종현(남, 1935년생, 귀산본동 거주)

황은준(남, 1933년생, 석교마을 거주)

이두봉(남, 1930년생, 석교마을 거주)

김옥주(여, 1936년생, 귀산본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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