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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내려와 정착한 최창실 옹의 기구한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30203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정헌

석교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최창실 옹이란 분이 있다.

최창실 옹은 2008년 현재 89세로, 허리가 많이 휘어져 있어 거동이 불편하지만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창실 옹은 현재 김해 진영 출신의 부인 사이에 아들 3명과 딸 둘 등 5남매를 두고 있다.

황해도 재령군 청천면 양대리 텃골에서 태어난 최창실 옹이 석교마을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최창실 옹은 고향에서 20세에 첫 결혼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고 중신애비의 말만 듣고 했다고 한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큰딸을 낳고 뒤이어 다시 딸을 낳았으며, 그가 남으로 내려온 해에 아내는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지금까지도 뱃속의 아기와 두 딸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운다고 했다.

전쟁이 터지자 북한에서는 지원병을 모집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최창실 옹도 강제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31세 때의 일이었다. 마을에서 50여 리나 떨어진 곳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곳에 모인 청년들과는 달리 자신은 나이가 들어 시력검사에서 보이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꾀를 내어 다행스럽게 불합격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에 들러 이틀간을 그곳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마을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이제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40세까지의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리고 소문대로 얼마 후에 강제로 재령군의 모처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해 있는 낯익은 마을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40여 일간 군사훈련을 받고는 이내 재령역에서 열차에 실려 해주에 있는 모 중학교에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부대를 배치 받았다. 여기서도 마음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만을 곰곰 생각했는데,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환자부대에서 환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소용없이 억지로 군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한창이던 때 최창실 옹이 소속된 부대가 인천 가까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인민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는 사리원에서 온 병사와 함께 부대 탈출을 감행하였다. 빈집을 찾아 군복을 벗어 버리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당시는 모두 피란을 떠나고 없어 모두 빈집으로 남아 있었는데 한 집에 들어가 농짝을 뒤져보니 10월경이었는데 바지저고리가 있어 이것을 걸쳐 입고 총은 그 집에 버려두고는 지역 사람 행세를 하기도 하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을 묻기도 하여 난처한 일도 생겼지만, 자신도 고향 가는 길을 알 수 없던 터라 어물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걷기를 며칠 만에 사과로 유명한 황해도 항주까지 와버렸다. 이미 고향을 지나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리원쯤 왔을 때 큰 강을 사이에 두고 검고 희고 누런 사람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남한 군인들이어서 사람들 무리에 끼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고향으로 가고자 했으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최창실 옹은 그곳 사리원에서 인천으로 강제로 이송되어 인천형무소에 갇혔다.

이곳에서도 최창실 옹은 오직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밖에는 없었다. 더러 안면이 있는 마을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인천형무소에서 한 달여를 보냈는데, 당시 형무소에는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면 고향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이에 하루 빨리 형무소에서 부산 갈 사람을 뽑아 주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마침 부산으로 갈 사람을 뽑기에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어 부산의 모처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최창실 옹의 나이 32세 때였다.

당시 부산의 포로수용소에는 3,000여 명 정도의 포로가 있었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3년 만 있으면 다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다시 거제포로수용소로 강제로 옮겨졌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군도 모르게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들을 석방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도망을 쳐서라도 이곳에서 하루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거제포로수용소에서 1년이 채 못 된 어느 날인가, 최창실 옹은 밤중에 몇몇 사람과 함께 차에 실려 신마산포로수용소(당시 화력발전소 바로 위에 있었다. 최창실 옹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일 것이라고 현재까지 굳게 믿고 있었다)로 오게 되었다. 당시가 농번기라 포로들을 마산 진북면의 각 마을 농활 활동에 배속시키려고 데려온 것이다.

최창실 옹은 진북의 한 마을에서 모심기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 너무 많은 포로들이 왔다고 하여 포로들을 다시 인근의 각 마을로 분산시켰는데, 최창실 옹은 처음에는 창원군 웅남면으로 갔다가 다시 함께 온 포로 3명과 함께 귀곡동으로 오게 되었다.

마침 삼귀국민학교에서 소사로 일하던 분이 군에 입대하여 소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당시 교장으로 있던 배우실(배우슬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당시 최창실 옹보다 네 살 더 많은 젊은 교장이었다고 한다)이란 분이 최창실 옹을 소사로 채용하였다. 마침 사택의 단칸방이 비어 있어 최창실 옹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이 34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식량배급(안남미와 보리쌀이 나왔다)에 의존하여 살았는데, 최창실 옹은 5인분을 받았기 때문에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였으나 늘 마음은 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뿐이었다. 당시 교장 월급이 700원 정도였고 최창실 옹은 200원 가량을 받았는데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소사 일을 2년 정도 했을 무렵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곱지 않게 보았는지 신고하는 바람에 강제로 보국대로 끌려가 1년 가량 보국대 생활을 하였다. 다시 돌아오니 교장이 다른 사람을 채용하지 않고 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그때의 고마운 마음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후 36세 때 현재의 아내를 만나 가정도 새로 꾸리게 되었다. 그리고 23년간 학교의 궂은일을 하면서 현재의 두산중공업 근처에 조그만 집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공장이 들어서므로 어쩔 수 없이 집을 매각하고, 그 보상금으로 현재의 집을 마련한 뒤 집 옆에 1652㎡ 가량의 텃밭을 구입하여 살게 되었다. 최창실 옹은 학교 일을 그만 둔 후로 홍합양식장 일을 하고, 부인은 포도농사며 논농사도 짓고, 텃밭에 깨와 마늘·콩·고추 등 필요한 농작물을 심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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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양식장

예전에 조개 한 되에 400원 가량 되었을 때는 부인이 조개를 캐서 많이 팔았다고 한다. 당시 하루에 잘 캐면 1말까지 캐어서 마산 어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하며,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단다.

[정보제공자]

최창실(남, 1920년생, 석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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