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B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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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석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동산 김명윤(金命胤)의 삶은 여러 일화와 함께 적지 않은 유산들을 유·무형으로 전해 주고 있다. 그는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26세 때 일본통신부사의 종사관으로 추천되어 일본을 다녀오는 기회를 얻었다. 1590년의 일이다.
이듬 해 2월 돌아와서는 상세한 현지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바로 『동사일록(東槎日錄)』으로 알려진 책이다. 『동사일록』은 당시 일본의 풍토와 민속 및 정세를 상세히 기술한 책이라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의 철저하고도 꼼꼼한 성품을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 일로 그는 일약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1592년(선조 25) 파주목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을 맞았다. 왜적은 승승장구하여 여러 고을을 함락하여 들어왔는데, 그는 요로에 군사를 매복하여 방어에 힘을 쏟아 잡힌 포로가 많았으므로 왜적이 감히 그 경계를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말과 활과 검을 하사하였는데, 검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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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김명윤 선생의 유품 쌍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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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윤 선생의 유품인 쌍검
검은 2점[쌍검]으로 칼[刀]과 같은 모양이나 양쪽에 날이 서 있고, 등 쪽에는 가지가 붙었다. 나무를 꽂았던 손잡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원래의 모습을 잃었는데, 크기는 62㎝에서 73㎝ 가량이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3호 지정되었다. 이들 유품은 그동안 도봉서원에서 보관하다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위탁 관리를 맡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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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과 상산김씨 종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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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
동산 선생은 1594년(선조 27) 11월 충주목사에 보임되었다. 신중함과 정밀함으로 업무를 처결하니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충주는 적의 통로에 해당하는 요충지라 허물어진 성책을 보수하여 훗날 정유재란 때 충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때 지은 진중시(陣中詩) 두 수가 『동산선생실기(東山先生實記)』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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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선생실기』
병난에 찌든 지도 어느덧 5,6년/
이 몸은 나라 위해 죽기를 맹서했네/
하늘이 이 나라를 돌보시길 비노니/
피비린내 나는 전란 어느 때나 그치려나
긴 칼 턱에 괴고 하염없이 앉았노니/
긴 밤 시름에 겨워 홀로 잠 못 이루네/
외로운 성 지키기에 오늘도 여념 없는데/
갑옷 입고 창을 밴 지 벌써 몇 해던고. -「술회(述懷) -충주에서」
시가 실려있는 『동산선생실기』는 후손들이 선생이 남긴 시문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1866년경 간행되었다. 책 안에는 선생의 세계(世系)와 함께 시(詩)·서(書)·기(記)가 실려 있어 그의 문사(文士)로서의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한다. 1976년 번역본이 간행되고, 2002년에 증보판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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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선생실기』(번역본)
전란이 끝난 1599년(선조 32) 선생은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진주는 전란 동안 김시민 장군이 온 부민들과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논개의 이야기로도 유명하였으나 전란이 끝나자 온 고을은 전쟁의 휴유증으로 황폐해졌고 백성들의 살길이 막막하였다. 이에 동산선생은 백성과 군졸들을 어루만져 안정을 되찾도록 노력하였다.
1602년에는 홍주목사를 잠시 맡았다가, 이어 제주목사를 역임하고 160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목민관으로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곳곳에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그 내용은 『선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605년(선조 38)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포상하였다. 이때 동산 선생은 선무원종 1등공신에 수록되어 철권을 하사받았고, 특명으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는 공신녹권의 정식 명칭은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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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공신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