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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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間人虐殺 |
영어의미역 | Massacre of the Innocent People |
이칭/별칭 | 양민학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한국전쟁 개시 이후에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개설]
해방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을 자행한 주체는 남한 측의 경우 주로 미군, 국방군, 경찰 등이었으며 북한 측의 경우 인민군, 빨치산, 지방의 좌익세력 등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전쟁 초기 남한 측 정부의 방침에 의해 군·경찰이 전국적으로 자행한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도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창원시에서 일어난 소위 ‘민간인학살’은 바로 이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적 배경]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극심한 좌우대립이 계속되었다. 남쪽에서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사회주의세력을 축출하려 하였고 사회주의세력도 강하게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4·3항쟁, 여순사건 등이 발생함과 더불어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였다. 이에 남한 측 정부가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로 구성된 보도연맹원들의 북한에 대한 동조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한다는 미명하에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던 당시 창원은 군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인구가 많지 않은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많은 지역의 치안을 마산이나 진해 등 타 지역 경찰서가 관할하고 있었다. 따라서 창원 지역의 경우 보도연맹원들이 각기 다른 관할 경찰서로 검속됨으로써 희생자들에 대한 전체적인 현황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기록된 관련 자료나 증언 등에 의하면 우선 당시 대산면 지역 보도연맹원 40~50여 명이 인접 지역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으로 끌려가 학살되었으며 마산경찰서 관할 지역 보도연맹원 70여 명이 당시의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안데미골과 남산, 창원고개 등으로 끌려가 총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당시 웅남면 외동에 살았던 정모씨는 아버지·삼촌·고모·5촌과 6촌 형 등 가족과 친척 5명을 잃었다고 증언했으며, 전직 경찰관 황모씨는 당시 북면 신촌리 신리마을에서도 황인성 등 보도연맹원 7명이 마산형무소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현 창원터널 근처의 불모산동에서도 보도연맹원 9명이 성주지서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되었으며 이들 외에도 성주지서 경찰관이 집집마다 돌면서 관련자들을 연행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그 외에도 웅남면 목리에 살았던 주민 김모씨는 같은 마을에 살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같은 마을 사람 6명이 성주사 계곡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1960년 5월 22일자 『국제신보』의 경우 “암흑천지 곳곳에서 몸서리치는 동족학살…… 창원서도 6·25가 일어난 1950년 8월 이곳 북면에 주둔한 해군첩보대 파견대장 황광수가 60여 명의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잔인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때 상천, 하천, 내곡, 무곡, 동전, 명부, 외감, 내감 등의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황광수는 이곳을 지나가는 양민들을 제멋대로 빨갱이라 단정하여 마금산 기슭으로 끌고 가 마구 죽인 것이라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황광수를 찢어 죽이겠다고 분개하고 있다.”라는 보도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당시 창원 지역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전모도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어 이에 대한 정확하고 시급한 진상조사가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