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마산의 혁신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51
한자 馬山-革新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단체 김문갑|노현섭|김성립|이봉규|윤시형|조억제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1960년 이후 일어난 혁신 운동.

[역사적 배경]

마산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야당 도시’라 불릴 정도로 혁신 세력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 1952년 8월 5일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마산의 유권자들은 진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출마한 조봉암 후보에게 1만 1262명이 표를 몰아줬다. 당시 마산의 유효 투표자 수는 3만 3559명이었으니 33%의 시민이 조봉암을 밀었던 것이다. 이는 조봉암의 전국 평균 지지율 11%보다 월등히 높았다. 당시 창원 군민들도 총 7만 7332명의 투표자 가운데 2만 2630명이 조봉암에게 투표해 29%의 지지율을 보였다.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마산의 유효 투표자 수 4만 2926명 중 이승만은 2만 2770표, 조봉암은 2만 156표를 얻었다. 47%의 시민이 진보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던 것이다. 당시 창원 군민도 40%인 2만 4653명이 조봉암 후보를 지지했다. 이 역시 조봉암의 전국적인 득표율 36%보다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1960년 3·15 의거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자 마산에서도 ‘혁신’을 표방한 정당과 단체가 잇따라 발족했다.

[경과]

마산의 혁신 세력은 1960년 5월 5일 『마산 일보』에 ‘한국 혁신 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월 7일 혁신 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이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 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 대중당 마산시당을 창당했다. 참여한 인사들은 위원장 김문갑, 부위원장 김진정·이상두, 통제 위원장 조억제, 총무 부장 김기석, 총무 차장 김옥선, 조직 부장 최재문, 선전 부장 장정호, 선전 차장 박진방, 기획 부장 노준섭, 기획 차장 강훈, 재정 부장 권태무, 감찰 부장 한범석이었다.

통일 운동 단체인 한국 영세 중립화 통일 추진 위원회,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단체인 마산 지구 양민 학살 유가족회, 교육 운동 단체인 마산시 중등 교원 노조와 초등 교원 노조도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혁신 세력은 7·29 총선에서 공천을 둘러싸고 분열 양상을 보이다 급기야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들까지 함께 출마해 이전투구를 벌이게 된다. 마산에서만 사회 대중당 윤시형·조억제, 무소속 노현섭, 한국 사회당 김성립 등 4명의 혁신계 인사가 동시에 출마했던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4월 혁명 완수’, ‘부정 축재 몰수’, ‘독재 타도’, ‘빈곤에서의 해방’ 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특히 노현섭은 “부정 선거 원흉 및 양민 학살 관련자를 철저히 처단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분열된 혁신 세력을 신뢰하지 않았고, 3·15 의거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민주당 정남규를 당선시켰다.

활발한 사회 운동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사회 대중당 간부들은 물론 양민 학살 유족회, 영세 중립화 통일 추진위, 교원 노조 등의 핵심 간부들은 모두 쿠데타 세력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들은 소급 입법된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용공 혐의’를 쓰고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결과]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9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5·16 쿠데타 직후의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법원의 재심과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으며, 유족이 재심 신청을 했던 일부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