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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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玄燮 |
이칭/별칭 | 소담(昭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주완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 노현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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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4년 - 노현섭 일본 중앙대 법대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노현섭 마산 보통 상업 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노현섭 마산 부두 노조 위원장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노현섭 전국 자유 연맹 위원장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 노현섭 마산시 교육 위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노현섭 마산 노동 병원 병원장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노현섭 양민 학살 전국 유족회장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991년 - 노현섭 사망 |
출생지 | 노현섭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안녕 마을 |
묘소 | 노현섭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안녕 마을 선산 |
성격 | 사회 운동가|노동 운동가 |
본관 | 풍천 |
대표 경력 | 양민 학살 전국 유족회 회장 |
[정의]
창원시 마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노동 운동가.
[활동 사항]
노현섭(盧玄燮)[1920~1991]은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하였다. 8·15 해방 직후 마산 보통 상업 학교[현 용마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6·25 전쟁 이후 3개 부두 노조를 통합한 단일 지역 노조인 대한 노총 자유 연맹 마산 부두 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54년 마산 자유 연맹 위원장과 전국 자유 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 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 고등 공민학교와 노동 병원을 설립, 직업 운영하기도 했던 마산 노동 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마산시 교육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친형 노상도를 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으로 잃었으며, 자신도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중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려 필사의 탈출을 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직후 마산에서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에 나섰다. 노현섭은 6월 12일 마산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마산 지구 양민 학살 유가족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으며, 8월 27일 소복을 입은 유족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마산역 광장에서 마산 지구 합동 위령제를 열었다.
다음날인 8월 28일에는 부산 상공 회의소에서 경남 유족 연합회를 발족했고,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 자유당 중앙 당부 회의실에서 전국 유족회를 결성했다. 전국 유족회장도 노현섭이 맡았다. 전국 유족회는 양민 학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특별법 제정’을 공식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활발한 활동에 들어가게 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모든 핵심 간부가 혁명 재판에 회부되고 증거 자료는 모두 압수되고 말았다.
노현섭은 15년형을 선고받고 8년 정도 복역하고 나서 주거 제한 조건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옥살이 후유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됐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9년 10월 21일 유족회 사건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고, 2010년 6월 그를 비롯한 유족회 간부들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무죄 선고를 받은 그 해 10월 마산에서는 ‘소담 노현섭선생 기념 사업회’가 발족하였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안녕 마을 선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