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A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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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정헌 |
석교마을 500-1번지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공직에 몸을 담았던 분으로, 1973년 마산시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마산시 창원지구출장소를 거쳐 창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창원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여 1995년 정년퇴임까지 22년간을 근무하였다. 이종현 옹의 가계는 마을 이장 일을 3대째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종현 옹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12년간 이장 일을 보았으며, 부친 이수복[1908~1963] 옹 역시 일제강점기에 14년이나 마을 일을 맡아 보았다. 이종현 옹 역시 정식 공무원이 되기 전, 곧 그의 나이 29세 때인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간 이장 일을 보았으니, 이장 이력만도 3대에 걸쳐 마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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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현 옹
특히 이종현 옹의 부친인 이수복 옹은 생전에 이장 일을 보면서, 마을에서 노름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만류하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마을 방송으로 알려 당사자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 다반사여서 노름꾼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또 마을 뒷산인 산시고개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을 때 마을 처녀들과 놀아나는 군인들이 있거나 연애질하는 것을 보면 이를 막는다고 그 고개를 온통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수복 옹의 열정적인 마을 사랑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상상이 가며 듣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또 대동아전쟁이 나기 전인 1939년경에 전체 주민과 함께 현재의 마을 선착장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왜놈들이 조선 명절을 못 새게 했기 때문에 그들 눈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명절을 지내다 발각되는 날에는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왜놈들을 안심시키려고 설날 아침에도 일찍 동민들을 불러 부역으로 선착장 공사를 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야 저녁에 맘 편하게 조상께 제사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현 옹은 삼귀국민학교 3학년 무렵에 해방을 맞이했는데, 해방이 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해방의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마을 뒷산인 산성산과 마산 덕동 뒷산에는 일본의 고사포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해방되기 얼마 전 어느 날 밤이었는데, 마산 가포 본동에 있는 방앗간에 어른들이 보리방아를 찧으러 가서 바닷가에서 어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일본 비행기(날개가 아래위로 달려 있고 느렸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와 처음 보는 비행기(연합군 비행기로 엄청 빨랐다고 한다)들이 날아다녔다. 귀산에서 고사포를 쏘아 대고 덩달아 덕동에서도 쏘아 대고 야단이었다. 그 장면이 마을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그 전날 밤 마을 앞 바다 건너편에 일본 비행기 한 대가 바다에 떠 있었는데, 이 비행기는 바다에도 앉고 하늘에도 날아다니는 비행기로 당시 마을 어른들은 이 비행기를 ‘수이조끼’라고 불렀다.
이 비행기를 발견한 연합군 비행기가 와서는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비행기는 폭격을 받자 처음에는 두 동강이 나더니 한 번 더 폭격을 하자 세 동강이 나서 마침내 완전히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예전과는 달리 마을 주변이 조용해졌는데, 이종현 옹은 이 일이 일본이 힘을 잃어가는 전조였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일 중에 생각나는 일이 있다며 들려준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도 해방된 그 해 어머니 심부름으로 삼귀국민학교가 있던 마을에 살고 있던 부친의 외가에 갔는데, 할머니(부친의 외숙모로 자식을 일본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부유하게 잘 살았다)가 며느리한테 “우리 새끼 배고플 테니 밥 좀 줘라!” 하는 말에 며느리가 “(자기 딸인)재희도 먹을 밥이 없는데…….” 하고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어린 마음에도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어서 그냥 돌아온 기억이 있단다. 못 먹고 살 때였지만 자존심은 대단해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밥은 먹고 왔나?” 하는 말이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다고.
이종현 옹의 어머니는 당시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재봉사로, 웅남마을 사람들은 거의 이종현 옹의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다고. 품삯으로 현금을 주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쌀과 보리 등으로 대신 주어 끼니는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종현 옹은 그때 어머니가 사용하던 재봉틀을 가보 1호로 머리맡에 두고 애지중지 여기고 있다.
[정보제공자]
이종현(남, 1935년생, 귀산본동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