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A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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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정헌 |
석교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한 귀산동 603번지에서 50년 넘게 이 마을을 지키며 바다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황은준이라는 분을 석교마을회관에서 만났다.
황은준 옹은 현재 76세로, 25세 때 여섯 살 아래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황은준 옹은 고향 거제에서 24세에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친형이 그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거제 보다는 이곳이 살기가 좋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황은준 옹은 40대인 젊은 시절 5년간은 주로 멸치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멸치잡이 철은 대개 양력 7월부터 시작하여 섣달에 끝나는데, 멸치잡이 배는 크기가 약 5톤 정도 되었다고 한다. 멸치잡이에는 배가 두 척이 필요한데, 앞에는 배를 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기계배가 있고, 뒤이어 그물을 놓아 멸치를 잡는 목선이 있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대량으로 잡는 고깃배라고 상상하면 안 된다고. 조그만 파도에도 이리저리 쏠리기 때문에 그 고생을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일이라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연신 한숨이다. 승선 인원은 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멸치는 그래도 가까운 바다에서 주로 잡았기 때문에 집에는 수시로 들어와 잠깐이라도 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한다. 멸치는 마을과 가까운 마산 돝섬이나 진해만 등 근해에서 잡아 마산 어시장에서 경매로 판매되었다고. 노임은 일당으로 계산해 멸치가 그런대로 잡히는 날에는 60~70원 정도를 받았는데, 그 벌이로는 생계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것도 매일 벌이가 아니라 허탕을 치는 때는 아예 노임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그 때의 막막하고 어려움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 봄철과 가을철에는 바닥까지 훑으며 고기를 싹쓸이하는 데고리선에서 일을 했는데, 이 배는 흔히 큰 배로 고데고리배라고도 부른다. 다들 힘들게 살아가던 시절이라 석교마을 남정네라면 누구라도 고데고리배를 한 번쯤은 탔을 것이란다. 7~8명이 배에서 작업을 하는데 거제 앞바다는 물론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홍도, 부산의 알섬 등이 주 어업 무대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냉동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여름철에는 잡은 고기가 쉽게 썩어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선단을 형성하여 고기잡이를 했다. 한 번 나가면 보름 정도는 예사라 그 고생을 지금 젊은이들이 하루라도 한다면 다들 손사래를 칠 것이라고. 이 데고리선은 바닥에 있는 물고기까지 싹쓸이를 하기 때문에 엄연히 불법이라 단속을 피해 잡을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만약 적발이라도 되는 날에는 벌금을 무는 경우가 허다해 오히려 손해 보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황은준 옹은 나이가 들고서는 먼바다로는 나갈 수 없어, 현재는 마을 앞 바다에서 자신의 소형 배로 철따라 전어며 도다리 등을 잡아 마을 여러 횟집에 판매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으며 현재도 바다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매일 바다 꿈을 꾸며 살고 있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황은준(남, 1933년생, 석교마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