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봉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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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당산제는 봉산마을만의 동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중단된 동제는 송정마을과 봉산마을만이 참여하는 제의였으나 이 동제가 중단되고 1980년대 새로 시작된 당산제는 자여마을의 4개 마을, 즉 봉산마을·용정마을·송정마을·단계마을이 모여서 함께하는 제의이다. 이렇게 범위가 확대되어 시작된 당산제는 그 역사가 2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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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 중앙인 16번지에는 ‘통샘 터’라는 글이 새겨진 표지석이 하나 있다. 이것은 최근까지 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우물자리를 표시해 둔 것이다. 통새미라 불리던 이 우물은 예부터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으며,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하였으며, 맛 또한 좋아 인근 마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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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광 옹은 “난 아무 데도 가도 안 하고, 이 마을에 살았다고, 봉산에서 태어났는데, 16번지로 살림을 나가지고 여태까지 살고 있지.”라고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봉산마을의 원로이다. 1919년 1월 21일 봉산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마을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황봉광 옹은 형편이 좋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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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이 함께 지내던 동제에는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들 이야기의 진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제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봉산마을 동제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신비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야기] 사람들은 옛날 동제를 지낼 때에는 정성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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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에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마을 모임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모임으로는 대화상복계(大和喪服契)·정병일친계(精兵一親契)·향친상복계(鄕親喪服契)를 비롯한 상복계와 청년회·부녀회·노인회 등이 있다. 마을 모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은 대화상복계이다. 이 모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조성된 것으로 처음에는 17명의 주민이 모여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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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은 새를 뜻하는 ‘봉(鳳)’과 산(山)이 만나서 이루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이 전단산(旃檀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와 무관하지 않을 이름으로 생각된다. 봉산마을에는 마을의 여러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특히 자여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기 때문에 자여역과 관련한 이야기도 다수 전해지고 있다. ○굿터-봉산마을 전단산 산자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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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졌으며, 골목길 옆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다. 봉산마을 뒤 전단산 자락에서 시작되는 이 도랑과 골목길은 봉산마을과 용정마을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봉산리 45번지와 43번지, 15번지를 가로지른다. 특별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한 이 도랑과 골목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며 마을의 옛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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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봉산마을의 동제는 인근 송정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광복되기 10여 년 전에 중단된 것으로 알려진 이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에서 보름으로 넘어가는 자시(子時, 밤 11시에서 새벽 1시)에 이루어졌다. 이 동제는 지금의 자여마을 동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동제를 지내기 위해서 마을에서는 정월 초가 되면 가장 먼저 제의를 주관할 제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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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여마을 큰줄당기기에서는 외부에서 줄을 구입하여 이용하고 있으나, 과거 마을에서는 큰줄을 짚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리고 큰줄을 만드는 일은 농한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소일거리가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의 친목 도모를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동 작업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이 큰줄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모여 만들었다 하여 ‘새벽줄 드린다’고 하였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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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마을의 줄당기기는 현재 정월 대보름 단 하루만 이루어지나, 예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꼭 연희하는 것이 아니며, 하루가 아닌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다. 보통 정월 초이틀부터 시작하여 길게는 20일까지도 줄당기기가 이루어졌다. 한때는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골목줄을 당겨, 정월달에 큰줄을 당기기까지 하였다고. 줄을 당기는 날짜는 정확히 정해진 것은 없으나,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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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 줄당기기는 본시 전단산 자락에서 시작되어 봉산마을의 가장자리를 흐르고 있는 하천 변의 골목길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의 줄당기기는 자여마을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당산나무 앞을 지나는 큰길에서 이루어진다. 이 큰줄당기기는 그 역사가 10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아가 매년 연행되면서 주민들에게 연례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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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마을 당산제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시작된 마을제사이자 대동제이다. 이 제의는 해방 이전에 중단된 것으로 알려진 봉산·송정 마을의 동제와 단계·용정 마을 동제의 맥을 이은 것이다. 그런데 이 제의는 과거의 것과 다르게 변화된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 그래서 여기에서는 해방 이전의 동제와 오늘날의 당산제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제의를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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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은 한 해를 모두 투자해서 임하는 것이다. 단시간에 파종에서 수확의 결실을 맺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견뎌야만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사일이다. 이러한 농사일을 하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러 사람의 일손을 한꺼번에 필요로 하는 작업도 있다.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동 작업을 할 때는 우리네 조상님들은 두레와 품앗이를 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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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마을에 있었다고 알려진 자여장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이 때문에 자여장의 모습은 옛 기록과 주민들의 기억 속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자여장은 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자여역이 있던 송정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봉산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자여장은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의 경계선을 이루는 작은 도랑가를 따라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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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의 줄당기기는 자여마을에 속한 4개 자연마을(봉산마을·송정마을·용정마을·단계마을)이 모두 참여하는 큰 행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자여역이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옛날 자여역에서 근무하던 찰방이 줄당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자여마을의 줄당기기는 마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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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은 자여마을에서 나누어진 지 채 15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까지는 송정마을·용정마을·단계마을과 함께 하나의 자여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봉산마을 입향조는 자여마을의 입향조와 같다. 자여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예부터 창원에 터를 두고 형성된 창원구씨와 창원편씨로 알려져 있으며, 이 후 봉산마을로 그 생활권이 확대되어, 지금의 마을 입향조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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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마을 동읍농협 앞에는 작은 골목길이 있다. 이 작은 골목길을 따라가서 송산노인정을 지나면 봉산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가 나타난다. 이 가게 앞을 지나 10m 가량 더 들어가면 통새미의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봉산리 16번지에 세워진 이 표지석은 옛날 마을의 주요 샘이었던 통새미를 기억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워 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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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은 최근 100여 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다양하게 변화된 마을 모습을 살펴보는 방법으로는 기록으로 남겨진 문헌 자료를 이용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더듬어 끌어내는 방법 등이 있다. 그러나 봉산마을에 대한 문헌 자료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마을의 옛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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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봉산마을에서는 본격적인 농번기가 들어가기 전 3월 초가 되면 회추를 즐겼다. 회추는 농촌사회에서 매년 고된 노동 속에서 하루를 쉬어 가는 날을 의미한다. 봉산마을에서는 회추를 해치 또는 해추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회추를 하는 날이면 집집마다 쌀을 반 되 혹은 한 되씩 갹출한다. 농촌사회였던 마을에서는 이렇게 돈보다는 곡식을 걷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쌀 반 되를 걷고...